• 左派가 平和라는 단어를 애용하는 이유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자들이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이제는 非인간적 이념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단 1보도 포기하지 않았다”

    김필재  

    평화공존전술은 통일전선전술과 마찬가지로
    공산세력의 힘이 미약한 단계에서 충분히 실력행사가 가능해질 때까지
    일시적으로 상대를 기만해 경계심을 이완시키는 전술이다.

    이후 공산세력의 힘이 자라고 그들에게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었을 때
    언제든지 침략을 자행하는 저의가 도사리고 있는 전형적인 기만전술이다. 
      
      역사적으로 평화공존전술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전쟁에 의한 황폐를 복구시키기 위해
    자본주의 제국과 講和(강화)를 맺는 것이 기원이 된다.
    이 전술이 크게 대두된 것은 1956년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에 의한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 연설과 1954년 모택동에 의한 ‘평화원칙’ 등이다.

    후루쇼프는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평화공존전술에 대해
    “평화공존은 결코 계급투쟁의 포기나 타협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공존이란 국제무대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치열한 경제·정치·이데올로기 투쟁의 한 형태”
    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수용소 군도》의 著者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평화공존에 대해
    《미국에 경고한다》에서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자들이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이제는 非인간적 이념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단 1보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從北세력이 주장하는 평화체제·평화협정의 개념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1983년 발행한 《백과전서》와
    북한의 對南선동 기구인 <반제민전>은 한반도 평화체제 및 평화협정의 개념을
    아래와 같이 ‘미군철수’라고 못 박아 놓고 있다. 
      
      ▲“평화협정은 쌍방이 서로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고, 무력증강과 군비경쟁을 그만두며
    미국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통일을 방해하지 않으며,
     남조선을 强占(강점)하고 있는 미군을 철거시키어 미군이 철거한 다음
    조선은 그 어떤 다른 나라의 군사기지나 작전기지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있다.”(北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년 발간 《백과전서》)
      ▲“평화체제를 공고히 하고, 미군을 철거하여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성취하자.”
         (2005년 8월19일자 <반제민전> 논평)
      
      利敵단체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의 경우 북한의 위와 같은 평화체제 논리를 그대로 수용해
     2007년 7월27일 ‘주한미군 철수가 한반도 평화체제다’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내기도 했다. 
      
      단체는 성명에서 “미국은 소위 북한의 남침을 억제한다는 구실로 한국의 군사적 주권을 장악하고 주한미군을 장기간 주둔시키고 있다”면서 “한국 전쟁과 북한의 남침위협이 미군주둔의 이유라면 당연히 北美終戰선언과 함께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단체는 또 “우리는 미국의 알맹이 없는 종전선언이니 평화체제니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며
    오직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그 순간 한반도 평화체제가 시작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美국방대학원 산하 국가전략연구소(INSS) 스티브 플래너건 소장은 2005년 10월4일
    국방대가 주최한 국제안보학술회의에서 “북한의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이 한미동맹 파기라는
    북한의 장기적 전략목표 구현을 위한 전술”
    이라고 지적했다. 
      
      플레너건 소장은 “북한은 아직까지 스스로 지켜낸 약속이 없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을 현재 신뢰할 수 없는 협상대상자로 보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와 함께 韓美동맹이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시각이 대두되면,
    장차 동북아 안정에 핵심적 지위를 담당하는 한미동맹의 역할을 간과하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 ▲ 남쪽 베트남 패망후 바다를 떠도는 보트 피플.
    ▲ 남쪽 베트남 패망후 바다를 떠도는 보트 피플.

      베트남 공산화를 초래한 ‘파리 평화 협정’
  
  베트남은 1973년 ‘파리 평화 협정(Paris Peace Accords)’을 체결 2년 만에 공산화됐다.
 북베트남(월맹)과 남베트남(자유베트남) 간의 전쟁이 한창이던 1973년 1월27일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 평화 협정’이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4자간에 체결됐다.
‘파리 평화 협정’은 ▲베트남 주둔 미군의 철수 ▲전쟁포로 송환 전쟁포로의 송환 ▲현재 상태로의 정전  ▲남베트남에서의 사이공 정부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간에 연합정부 조직을 위한 협의 ▲정치범의 석방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후 북베트남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는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 공산화 통일을 성공시켰다. ‘파리 평화 협정’ 체결 이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전쟁에 월 20억 달러가 넘는 戰費(전비)를 지출했다. 
  
  그러나 戰況(전황)이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1968년 3월31일 DMZ를 제외한 지역에 대한 폭격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같은 해 大選 불참을 발표했다.
존슨 대통령은 에버렐 해리먼을 대표로 지명,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노이 당국과 평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도모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1968년 5월13일 ‘평화협정’의 첫 회의가 개최됐다. 
  
  북베트남은 그러나 쉽게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들을 제시했다.
핵심은 남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라는 것이었다.
하루빨리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反戰여론을 의식한 존슨의 후임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아시아는 아시아의 손에 맡긴다는 정책으로 급선회하여
미군의 철수를 시도했다. 
  
  이후 1973년 1월27일 파리협정이 체결됐고, 닉슨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시작된 인도차이나 개입의 멍에를 20여 년 만에 벗어던질 수 있었다. 닉슨은 모든 자원을 동원해 남베트남의 티우 정권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그의 영향력은 사라져갔다. 
  
  1974년 군사적 균형은 이미 북베트남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북베트남은 1975년 본격적인 공세를 감행했고, 불과 55일 만에 사이공 정부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얻어냈다. 사이공 함락 후 남베트남의 지도층 인사, 공무원, 지식인들은 수용소에 보내졌다.
심지어 북베트남을 도와 사이공 정권 반대운동을 벌였던 인사들도 대부분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베트남 전쟁은 동남아의 정치 상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캄보디아는 1975년 4월 프놈펜이 ‘크메르 루주’에게 장악되어 공산화됐다.
북베트남의 주요 전쟁물자 供給路(공급로)였던 라오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자
1975년 5월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김필재/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