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을 바로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 소련의 흉계(4), 남북지도자 연속회의

    스탈린의 공산통일 시나리오에 놀아난 김구

     최 응 표 /뉴데일리 고문 (한국사 바로 알리기 미주대표)
  • ▲ 최응표
    ▲ 최응표

 회의 공식 명칭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속회의’다.
이것 역시 북한 위성국 만들기와 가짜 김일성 만들기,
그리고 미소공동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계획된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 전략의 한 작품이다. 

김극후 씨가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밝힌 대로,
 ‘남북연속회의’는 조선 노동당과 김일성이 주도해서 열린 게 아니라 ‘소련의 한반도 소비에트 화’ 전략에 따라 소련군정의 기획,
연출, 감독 하에 꾸며진 흉계였다. 

한편 김일성은 통일정부 수립 때, 김구와 김규식에게 일정한 자리를 미끼로 회유해
‘남북 연속회의’를 자신들의 정권수립에 대한 정통성확보에 이용하려는 계획이었다는 것도
뒤늦게 밝혀졌다. 
  • ▲ 최응표
    더욱이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 지도자 연속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 ‘미제 간첩’으로 몰아붙이라>는 소련군정의 지시는
     ‘남북지도자 연속회의’가 소련의 무서운 음모와 흉계였다는 사실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양의 소련군정, P 247) 

    ‘남북지도자 연속회의’가 소련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제의한 ‘남북협상’에 대해, 소련이 그 회담 목적과 계획을 세우는 동안 김일성과 김두봉이 김구와 김규식에게 회신을 보내지 못했다는 1948년 ‘신동아’ 3월호에 게재된
     이정식 교수의 기고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소련은 애초부터가 북한을 소련 이익의 교두보로 삼아 그곳에 위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목적
    (이지수 교수의 제2차 세계대전과 소련의 한반도 정책)이었고,
    ‘남북지도자 연속회의’도 북한정권수립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계략에서 꾸며진 것과,
     심지어 연속회의가 채택한 결의문도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정치국이 작성했다는 사실을
    이정식 교수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의 기원’에서 밝히고 있는가 하면
    ‘결의문’은 회의가 열리기전에 이미 채택돼 있었다는 설도 꽤 설득력을 얻고 있다. 

  • ▲ 소련의 스탈린(오른쪽)과 중국 모택동.
    ▲ 소련의 스탈린(오른쪽)과 중국 모택동.
    더욱 놀라운 사실은 1948년 4월 8일, 남북 지도자 연속회의에 내린 소련의 4대 지침이다. 

    1), 남한 총선(5, 10선거)반대와 분쇄
    2),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조선에서 추방
    3), 소련군, 미군 철수
    4), 총선은 외국군이 철수한 뒤 실시 (평양의 소련군정 참조) 

    위의 4대지침은 소련의 속셈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남북 지도자 회의를 제안한 김구, 김규식의 기본 의도도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자는 것이었고, 북한의 주장도 표면적으로는 같은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1946년 2월에 단독정부를 세웠고, 그에 따라 1947년 12월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했으며, 1948년 2월에는 총 병력 6만에다 소련의 지원으로 시베리아에서 탱크와 항공기 및 현대식 통신장비에 관해 훈연을 받은 간부 1만 명 병력을 갖춘 인민군(이영훈 교수의 ‘대한민국 역사)을 창설해 놓은 상태였다(실질적으로는 1946년 7월부터 인민군 육성이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 대해 양동안 교수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 건국사]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실질적인 남북협상이 되려면 남한정계의 다수를 대표하는 중요정당, 사회단체 대표와 북한의
    중요 정당, 단체 대표가 만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 측은 이미 자기들은 단독정권을 2년 전부터 수립해 놓고서는 남한에서 정권수립을 위한 총선을 준비 중인 남한 최대의 정치세력을 배제하고 총선에 반대하는 세력의 대표들만 초청했다. 소련이 미소공위에서 통일정부 수립에 남한우익을 배제하고 남북한의 좌익 및 좌경세력만 참여시키려고 한 것과 동일한 태도다.” 

    이렇게 본다면 ‘남북지도자 연속회의’에 있어서 김일성과 북한노동당은 완전히 꼭두각시였고,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 전략에 따라 꾸며진 소련의 흉계였다. 

    애당초 저들의 목표가 바로 남한을 분열시키고, 그 반사이익으로 북한 공산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반도 전체를 공산 화 하기 위한 준비모임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구, 김규식의 북한행은 저들의 공작에 힘을 보태준 꼴이 되었다. 
  • ▲ 김구(가운데) 일행은 한독당 당원들의 방북반대 데모에 막힌 경교장을 몰래 빠져나가 38선을 넘으며 기념 사진을 찍었다.
    ▲ 김구(가운데) 일행은 한독당 당원들의 방북반대 데모에 막힌 경교장을 몰래 빠져나가 38선을 넘으며 기념 사진을 찍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정치적 오류

    이승만은 ‘남북회의’에 대해 1948년 4월 2일,
    “남북회담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 화 하기 위해 시간을 끌려는 소련의 음모이므로
     그것에 호응하는 것은 소련을 돕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그에 앞서 이승만은 소련과 직접 회담한다면 몰라도 그 앞잡이인 김일성과 만나
    무슨 성과가 있겠느냐며, 소련은 이미 북한에 그의 위성국을 세우고 공산주의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시키려는 만큼 남한에서만이라도 그것을 막기 위해 반공적, 반소적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주영 교수의 ‘대한민국의 건국과정 P 121) 

    또한 이주영 교수는 남북지도자 연속회의는 소련공산당에 의해 짜여진 각본에 따른 것이며,
    소련군은 이미 3월 초부터 남북회담을 준비했고, 의제를 비롯해 세밀한 문제들에 대해
    김일성에게 지시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한편 김구는 “빨갱이라도 피와 뼈를 같이한 우리의 동포이므로 동족끼리 마주 앉아 최후의 결정을 봐야겠다(이주영 교수 저서)"는 생각으로 참여했지만 결과는 저들의 공작에 이용만 당하는 우를 범했다. 

    북한은 1948년 4월 28일, 남쪽 참석자들에게 소련공산당 정치국과 스탈린의 재가를 받은
    헌법초안을 북조선인민회의(국회)가 검토하는 현장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북한 단독국가 건설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는 작업이었다. 

    김구, 김규식이 제안한 남북협상의 원래 목적은 남북한의 모든 중요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통일정부수립을 논의하자는 것인데 반해, 북측의 저의는 남한총선을 반대하는
    남북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평양에 모여 이미 수립-공고화되고 있는 북한공산정권을 중심으로 한 남한정권 수립 저지 통일전선 형성이 목적이었다. (양동안 교수의 대한민국 건국사 참조)

  • ▲ 1948년 4월 평양에 간 김구(오른쪽)가 김일성의 뒤를 따르고 있다.
    ▲ 1948년 4월 평양에 간 김구(오른쪽)가 김일성의 뒤를 따르고 있다.

    김구는 평양의 남북회의가 자신이 제안했던 취지와 동떨어진 공산혁명을 위한 거대한 군중집회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고, 소련의 허락을 받은 헌법이 단독국가 건설 마무리작업으로 검토되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서울로 돌아와서는 “평양회의가 우리민족도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성공적인 회의였다”고 뜻밖의 주장을 했다.
    (이주영 교수의 ‘대한민국 건국과정) 

    김구와 남북연속회의에 대해 많은 설(說)들이 있지만, 김구가 남북연속회의에 다녀온 뒤인 1948년 7월 11일에 있었던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대표 유어만 공사와의 대화내용은 정말 충격적이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사업에 협력해 달라는 유어만 공사의 부탁에
    김구는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한다 해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남진(南進)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조갑제) 

    김구의 대답은, 북한군은 반드시 남침할 것이고, 그러면 대한민국이 건국되더라도 망할 것이 뻔한데, 어차피 망할 정부를 구태여 세울 필요가 있느냐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구는 유어만 공사에게 자신이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하게 된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래서 김구는 북한에 갔고, 소련의 북한 공산기지 구축을 위한 공작으로 이미 북한에 단독정부가 세워졌고(1946년 2월), 토지개혁이 실시됐으며(1946년 3월), 화폐개혁을 단행했는가 하면(1947년 12월), 엄청난 규모의 붉은 군대가 조직돼 있는 사실(1948년 2월)뿐 아니라 스탈린 헌법을 모방한 사회주의 헌법까지 채택해 놓은 사실들을 실제로 보고 왔다. (양동안 교수의 대한민국 건국사 참조)

    그런데도 서울에 돌아와서는 이미 세워진 북한의 단독정부와 북한 붉은 군대의 남침위험에 대해서는 입을 담은 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만을 주장했다. 

    이미 세워진 북한의 단독정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저지만을 주장하는 김구는 한반도에 어떤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원했던 것일까? 공산체제 아니면 민주체제? 

  • ▲ 스탈린의 특명으로 김일성(소련군 대위, 왼쪽)을 북조선 공산위성국 두목으로 양성한 스티코프 대장>
    ▲ 스탈린의 특명으로 김일성(소련군 대위, 왼쪽)을 북조선 공산위성국 두목으로 양성한 스티코프 대장>

    김극후 씨의 [평양의 소련군정]에 실린 1948년 5월 3일자,
    김구와 김일성의 대화는 충격을 넘어 김구의 인격자체를 의심케 한다.

    김구: 만일 미국인들이 나를 탄압한다면, 북한이 나에게 정치적 피난 처를 제공할 수 있는가? 

    김일성: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남북 연속회의를 소련의 음모로 보고 만류한 이승만과 북한에 정치적 피난처까지 부탁한 김구, 이렇게 확연히 갈라진 우리현대사의 두 거목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에 실린 도진수 교수의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김구: 오늘(김구가 평양을 떠나는 날) 조선생(조만식)을 데리고 가고 싶으니 같이 가게 해주구려!

    김일성: 아! 제 마음이야 얼마든지 같이 가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어 디 제가 무슨 권한이 있어요? 주둔군 당국(소련군정)의 양해 가 있어야 됩니다. 

    이 대화내용은 북한이 완전한 소련의 위성국 상태임을 말해준다.
    그러니 ‘남북정치지도자 연속회의’ 같은 정치적 대행사를 김일성이나 북한 노동당이 어떻게
    제마음대로 벌일 수 있었겠는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욕은 구한말(舊韓末) 때부터 키워왔지만,
     신흥 일본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2차 대전 승전국이 되면서
    북한을 기지로 그 야욕을 실현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어쨌거나 소련은 미국의 제지로 (전후)戰後의 일본 공동점령과 38선 이남으로의 진격이 좌절된
    반면 북한을 위성국화 하면서 옛 야욕의 절반은 달성한 셈이다. 

    반면 김구의 정치노선 이탈과 남북회의 참여는 대한민국건국 사업에는 큰 지장을 주었고,
    북쪽의 공산정부에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