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제의 책> 전 외무장관 공로명孔魯明  회고록 [나의 외교노트]
    ‘외교’라는 거울에 비추어본 이승만 ․ 박정희 시대

  • 이 책의 저자 공로명(孔魯明)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원로 외교관이자
     대한민국 외교의 ‘산 증인’이다.
     그는 1958년 4월 외무부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1996년 11월 외무부 장관을 사임할 때까지
    38여 년간 우리 외교의 현장을 보고 듣고, 몸소 겪어왔다. 퇴임한 후로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동국대와 한림대, 동서대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그 후의 우리 외교의 발자취’에 관하여 강의를 했다.

    그는 외교관이 된 지 2년 뒤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하야를
    지켜보았다.
    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옆의 궁정동에서 일어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 사건은 서울보다 8시간 늦게 이집트 카이로에서 알게 되었다.
    카이로의 한국 총영사로 부임한지 불과 2개월, 서울을 떠나기 전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으로부터 격려의 말과 격려금까지 받은 그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대통령 유고라는 얘기에 나는 1962년 11월 워싱턴에서 점심 먹고 대사관에 들어서자 듣게 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당시 상황이 머리에 떠올랐다. 문명천지 미국에서 대통령 암살이라니! 라고 느꼈던 것이다. 세상에는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신임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쓰러졌다. 이렇게 한국의 큰 별은 진 것이다.”

    책의 부제(副題)가 ‘안에서 듣고 보고 겪은 한국외교 50년’인 것처럼 그는 「이승만에서 박정희까지」의 한국 외교사를 자신의 눈으로 담담하게 기록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지난 1970년대의 민주화를 위한 격동기를 겪는 가운데 수정주의적 입장에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는 사조의 도전을 받았고, 지금도 그러한 갈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점에서 대한민국의 체제 속에서 보고 겪은 우리의 외교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심정으로 글을 정리했다.”는 것이 조용한 성품의 저자다운 ‘집필의 변(辯)’이다.

    ‘직원 100명, 해외 공관 18곳’이던 시절의 외무부

    공로명이 첫발을 디딜 무렵의 외무부 청사는 지금의 광화문 서울파이낸스 빌딩 자리에 있었고,
    직원 수도 100명 안팎이었다. 재외공관 역시 외교공관(대사관, 대표부) 열두 곳과 영사공관 여섯 곳에 지나지 않았다.

    6․25전쟁 후 외교관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군 장교 중에서 충원하기로 한 외무부는 1955년에 1차 채용시험을 시행했다. 외무차관을 역임한 윤하정(尹河珽) 씨가 이때 뽑혔다. 두 해 뒤인 1957년의 2차 채용에는 저자 한 명밖에 합격자가 없어 이듬해 봄에 다시 3차 모집을 실시했다고 한다.

    이때의 채용조건은 촉탁을 거쳐 1년 내에 3급(지금의 5급)으로 임용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외무부 등용문은 고등고시와 외무부 자체 채용시험을 통한 임용(주로 대학 졸업생 대상) 두 가지 길이 있었다. 고등고시는 지금과 같은 임용시험제가 아니라 자격시험제로 여겨졌다. 따라서 고등고시 3부(외교) 합격자는 매 기에 따라 한 명 있을 때도 있었으며, 대체로 5-6명 전후에 불과했다. 저자는 초기 외무부 생활을 이렇게 회상했다.

    “교육을 마치고 배속된 부서에서 업무를 했는데, 이 무렵 촉탁의 보수는 7, 8천환이어서 한 달 동안 구내 다방에서 마신 외상 커피 값을 치르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주위에는 눈에 띄게 부유한 집 자제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한 처지여서 마음이 편했다. <논어>의 ‘팔을 굽혀 베개를 삼더라도 부귀는 흘러가는 구름과 같다(曲肱而枕之 富貴如浮雲)’는 심경으로 낭만적인 삶을 그 시절은 살았던 것 같다.”

    외교를 몸소 챙긴 이승만 대통령

    요새의 감각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나, 그 당시 외무부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올리는 문서는 영문으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지금은 여권 발급 업무를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하고 있으나, 그 시절에는 관용 여권과 유학 여권(문교부 해외 유학생 시험 합격자만 해당)을 제외한 일반 여권은 문화 여권이라고 하여 경무대에 가부를 물었다. 특히 외화 경비가 드는 안건은 반드시 경무대의 결재가 필요했으며, 영문으로 올라가는 서류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통령의 의견을 물어 결정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영문 서류의 결재에는 SR, 국문 건의서에는 가만(可晩)이라고 사인했다. 한평생을 독립이라는 섭외교섭에 전념했던 이 박사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외교는 몸소 챙겼던 것이다.

    대중(對中) 대일(對日) 관계에 대한 저자의 우려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중국 대륙의 땅은 산둥성이다. 산둥성은 중국의 22개 성(省)과 5개의 자치구 중 면적으로는 20위, 인구로는 2위가 된다. 한국과 비교하면 인구(9,400만 명)로는 두 배, 땅 크기(156,000km²)로는 1.6배가 된다. 나는 베이징에 앉은 중국 정책 입안자들의 눈에는 한국이 산둥성의 반으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이 아닐지 상념에 잠길 때가 있다.

    동중국해의 센카쿠 열도(중국의 댜오위다오)에서 일본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중국은 한국이 자신들과 공동으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대응할 것을 바란다. 선양역(瀋陽驛) 내의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소에 기념판을 새겨 넣게 해달라고 한 박근혜 대통령의 요청에 시진핑 주석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역 구내에 건립하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불편한 관계에 있더라도 일본은 우리의 우방인 만큼 일본을 비난하기 위하여 중국과 공동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장기적 한국의 국익에 플러스가 되는 일이 못 된다.

    아시아대륙 동북단의 반도에 속하는 우리 한국은 항상 우리보다 크고 강대한 이웃과 평화롭고 안정된 여건 하에서 어떻게 생존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되어 왔다. 이러한 지정학적 제약은 시공을 초월하여 주권국가로 생존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영원한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