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의 절대고독:
    붓의 시대를 칼로 버틴 한 조선 武人의 처절한 美學

    장교들의 베스트셀러《宋의 눈물》著者 鄭淳台(정순태)씨가
    韓中日에 걸친 입체적 취재로 위대한 人格의 심층을 드러냈다.

    조갑제닷컴  

    전쟁을 모르고, 바다는 더 모르는 朝廷(조정)에 시달리며 일체의 지원이 끊어진 조건에서, 온갖 모함과 투옥과 痛症(통증)을 견디면서, 무서운 준비정신과 모진 적개심으로 세계 최강의 군대와 홀로 맞서 나라를 구하고 散華(산화)한 위대한 人格(인격)의 심층을 엿본다.
     
                                                     鄭淳台 씀
236쪽 | 152*225mm | 13,000원 | 2014년 7월31일 | 979-11-85701-03-5 03910
전화주문(02-722-9411~3) 가능합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아직 열두 척이나 남았고, 신은 죽지 않았으니, 감히 우리를 욕보이지 못할 것입니다.”

붓의 시대를 칼로 버틴 조선 武人(무인) 이순신의 이야기를 담은 《이순신의 절대고독》(조갑제닷컴, 236페이지, 1만3000원)이 출간됐다. 著者(저자) 정순태는 10여 년간 한국, 일본, 중국의 역사 動線(동선)과 임진왜란의 중요 현장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현지 기행으로 연결하는 입체적 기술로 이순신과 임진왜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전쟁을 모르고, 바다는 더 모르는 朝廷(조정)에 시달리며 일체의 지원이 끊어진 조건에서, 온갖 모함과 투옥과 痛症(통증)을 견디면서, 무서운 준비정신과 모진 적개심으로 세계 최강의 군대와 홀로 맞서 나라를 구하고 散華(산화)한 위대한 人格(인격)의 심층을 엿본다.

아무하고도 나누지 않았던 이순신의 絶對孤獨(절대고독)이 드러나고, 붓의 시대를 칼로 버틴 한 조선 남자의 비장한 삶이 펼쳐진다. 치밀한 현장답사와 韓-中-日에 걸친 입체적 취재로 비로소 우리 곁에서 부활한 인간 李舜臣(이순신), 그의 숨결과 고뇌, 심장의 박동까지 느끼게 하는 實錄(실록)문학이다.

최강의 군대와 홀로 맞선 조선 武人의 숨결과 고뇌

10여 년의 추적 끝에야 이순신의 모습을 거칠게나마 더듬어보고 느낄 수 있었다는 저자는 이순신을 “절대고독으로 잠 못 이루던 장수”라고 평했다. 임진왜란 당시 국가의 지원이라고는 水使(수사)와 통제사라는 계급장뿐이었으나, 23戰23勝을 기록하며 병력 충원, 陣法(진법) 및 사격훈련, 판옥선과 거북선 등 戰船(전선) 건조와 각종 무기의 제작을 했고 군량확보를 위해 屯田(둔전)을 경영하며 魚鹽(어염)을 생산해 군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피난민까지 구호했다. 1인 10역을 하던 장수 이순신은 홀로 분투하며 밤에도 잠 못 이루고 깊은 시름으로 애태웠다.

常勝(상승)의 장군으로 백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이순신을 두려워한 선조와 시기했던 원균, 일본 첩자의 모략이 맞물려 투옥당하고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된 이순신. 이순신을 몰아내고 통제사 자리에 오른 원균의 함대가 왜군에 궤멸하자 백성들은 “만약 李통제사가 있었으면 어찌 이 왜적들로 하여금 한 걸음의 우리 땅인들 엿보게 할 수 있었겠는가”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런 국가적 위기 속에 白衣從軍(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통제사 再(재)임명의 통보를 받는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불과 13척의 배로 왜군 함대 133척에 역전승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이순신은 그날 일기에서 “此實天幸(차실천행)”,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라고 썼다. 저자는 “이것이 어떻게 천행만이겠는가? 고뇌하지 않은 장수, 목숨을 걸지 않은 장수라면 어떻게 이런 대역전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라고 묻는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전쟁의 기록을 남겨 국보에 오른 것은 충무공 이순신의 《亂中日記(난중일기)》와 서애 류성룡의 《懲毖錄(징비록)》뿐이다. 《난중일기》는 제1선의 장수로서 바쁜 軍務(군무) 중 간단히 기록한 것이니만큼 이것만으로는 임진왜란의 全局(전국)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를 심층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기록이 바로 《징비록》이다. 《징비록》을 “단순한 역사기록이 아닌 오늘날에도 숙독해야할 古典(고전), 우리 민족의 國難(국난)극복사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기록”이라 평한 저자는 이런 이유로 《이순신의 절대고독》에 《징비록》 현장답사를 종합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고 밝혔다. 일본·중국史에 정통한 저자는 장교들이 많이 읽는 《宋의 눈물》(조갑제닷컴)도 쓴 적이 있는데, 임진왜란에 참전한 明軍·왜군 장수들의 면면과 終戰(종전) 후의 운명도 다루고 있다.●

| 책 속으로 | 
‘원칙장교’였기 때문에 그의 하급 무관(武官)시절은 대체로 불우했다. 그는 시속(時俗)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먼 친척이었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한번 만나자고 해도 “율곡이 인사권을 맡아 보는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찾아뵐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이이(李珥)와 이순신은 같은 덕수(德水李氏)이다. 항렬로 치면 9세 연하(年下)인 이순신이 오히려 이이보다 높아 19촌 숙질간이 된다. 율곡 이이는 서인(西人)의 영수였다. 이순신은 동인(東人)의 영수인 서애 류성룡과 가까웠다. 
-35페이지 <제1부1장 원칙장교의 스타트라인>

이순신은 와키사카의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먼저 전선(戰船) 5~6척을 투입해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를 벌이다가 짐짓 약세를 보이며 퇴각하자, 일본 함대는 일제히 돛을 펴고 추격에 나섰다. 그들이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 이르자, 이순신 함대는 일시에 大선회하여 鶴翼陣(학익진)을 펴면서 반격으로 전환했다. 학익진은 함대의 공격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橫列陣(횡렬진)의 한 형태이다. 
영국의 해군제독 밸라드(Ballard, G. A.)는 그의 저서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에서 이 같은 이순신 함대의 대선회에 대해 “전문가 외의 사람에게는 이 기동이 종이 위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해군장교만이 숙련된 함대의 표준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57페이지 <제1부2장 나무못 박은 판옥선, 일본 군선을 압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 나의 애를 끓나니> 
…이순신은 무인(武人)이면서도 깊은 문학적 소양을 지닌 인물임을 한산도가(閑山島歌) 하나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비가(悲歌)는 문학적 재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절대고독(絶對孤獨) 속에서 잠 못 이루며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이런 시작(詩作)은 불가능하다. 그 무렵, 그에겐 최악의 시기가 닥쳐왔다. 
-60~61페이지 <제1부3장 고뇌하는 인간의 悲歌>

전단은 오전 11시경에 열렸다. 울돌목을 빠져나온 왜선들은 외양(外洋)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 전선을 포위해 각종 총포를 난사했다. 일본의 세키부네 여러 척이 이순신의 대장선(大將船)을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공격했다. 대장선만 각종 포와 화살을 난사하며 응전했고, 휘하의 전선(戰船)들은 강한 울돌목의 조류에 밀리기도 했겠지만, 실은 일본 수군의 척수와 기세에 눌려 키를 단단히 찍어 누르지 않아 뒤로 밀렸던 것이다. 이순신은 몸소 최선봉에 나서 일본 함대에 포위당한 채 상당 시간 홀로 버텼다. 대장선이 위험해지자, 거제 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다가왔다. 이순신은 이 대목에서도 명언(名言)을 했다.

“안위(安衛)야! 네가 군법(軍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안위의 판옥선이 황급하게 일본 함대 속으로 돌진해 갔다. 
-139페이지 <제2부10장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이 있습니다>

왜, 이순신은 고니시에게 퇴로(退路)를 열어주는 척하면서 그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던가? 원래, 전장(戰場)에 나선 장수는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兵不厭詐: 병불염사). 또한 ‘궁한 쥐는 쫓지 말라(窮鼠勿迫: 궁서물박)’는 전훈(戰訓)도 있지 않은가? 이순신도 길을 열어달라는 고니시의 간청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철수하는 고니시 軍의 꼬리를 때렸다면 오히려 그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이순신이 생리적으로 속임수를 싫어하는 유장(儒將)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든지, 전후(戰後)에 예상되는 숙청을 당하기보다는 깨끗한 이름만이라도 남기려고 죽을 자리를 스스로 선택해서 그랬을 것이라는 등의 억단(臆斷)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필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 이순신을 짙게 느낀다.
이순신은 왜군, 특히 고니시만은 기어이 잡으려 했던 같다. 그런 증오감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셋째 아들 이면(李葂)의 전사(戰死) 이후 더욱 응어리졌던 것으로 느껴진다. 이면은 명량해전의 복수를 위해 아산에 침범한 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 이후 그는 전장(戰場)의 장수로선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74페이지 <제2부13장 최후의 美學-노량海戰>

| 저자·鄭淳台(정순태) |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부터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신군부에 의해 해직당했다. 1981년 한국해운정보센터 차장,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 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主幹(주간)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月刊朝鮮>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月刊朝鮮>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류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1998)》 《金庾信-시대와 영웅(까치·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2007)》 《宋의 눈물(조갑제닷컴·2012)》 등이 있다. 

| 차례 |

서문│붓의 시대를 칼로 버틴 한 조선 武人의 처절한 美學

〈제1부〉 큰칼 옆에 차고

제1장·원칙 장교의 스타트 라인
순천향대학의 이순신연구소를 찾은 까닭
《난중일기》는 조선 수군을 지휘하기 위한 메모
어머니의 친정 있던 아산으로 이사한 까닭
군인의 길
첫 백의종군
꼿꼿 처신
히데요시의 협박장― “명을 치려고 하니 향도가 되라”

제2장·나무못 박은 판옥선, 일본 군선을 압도
國難에 대비함
판옥선은 박치기의 명수
火砲에서 일본 수군 압도
최초의 勝戰―옥포대첩
히데요시의 특명
한산대첩의 현장

제3장·고뇌하는 인간의 悲歌
국가지원 전무한 가운데 전력 증강
신경성 위장질환
국보 제305호 洗兵館에서
당포해전의 현장
순천왜성을 향해

제4장·유키나가를 역사법정에 세우다
多重性格의 임진왜란 선봉장 
死易假道難
“대왕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려는지?”
이순신 제거하기 위한 이간책

제5장·임진왜란 도발의 원흉 
일본 통일을 완성한 히데요시
도요토미 정권 붕괴의 자충수 
침략 당초에 동원된 병력 30만7000의 편제 
마닐라 총독에 대한 히데요시의 협박장

제6장·10전10승의 기지― 여수 
국보 제304호 鎭南館과 鎭海樓
출전!
거북선 등장
히데요시가 왜장에게 준 지휘용 금부채 노획

제7장·한산도해전의 세계사적 의의 
굶주림 
목동도 첩보원
登船肉薄戰
부산포해전

제8장·“이순신을 그냥 두고서는…” 
식량난에 전염병
3도수군통제사의 한계
선조, 원균의 수군을 과대평가 
군사문화가 낮았던 조선왕조
알몸으로 최후 맞은 원균
원균이 나쁜 장수로 평가되는 이유

〈제2부〉 울돌목의 大逆戰

제9장·이순신의 행보에 걸린 나라의 운명 
조선 수군의 재건
녹도만호 鄭運을 생각하며
녹동→사동→도장→마량 항로

제10장·“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이 있습니다”
‘Only One Point’ 울돌목
바다의 急流
名將의 조건
敵將을 토막 내다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 축에도 못 드는 사람”
이순신이 열흘간 머물며 앓았던 섬―고군산도를 바라보며

제11장·“왜선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녀 통분합니다”
“고금도의 형세가 한산도보다 배나 좋습니다”
고니시의 도주로를 차단한 朝·明 연합함대

제12장·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朝·明 연합군 1만의 수급이 묻힌 사천왜성 앞 무덤
유인작전
사천왜성의 내부
4路병진 작전
한려수도의 중심

제13장·최후의 美學―노량海戰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리고 ‘철군 결정’ 통보 
“전투가 급하니 내가 죽었다 하지마라”
노량 협수로의 처절한 夕陽

제14장·동아시아 3국의 ‘포스트 임진왜란’ 
히데요시 죽음 후 豊臣 정권의 내부 분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엇갈린 왜장들의 운명
냉혈한

제15장·동아시아 최강을 결정한 사르후 전투
만주족(여진족) 누르하치의 흥기
사르후 전투에서 나타난 광해군의 국제감각
임진왜란 참전 후 귀국한 明將들의 불운
사대 존명주의자의 집권으로 왜란 종전 40년 후 胡亂 자초

〈제3부〉 “잘못을 고치는 책” 《징비록》

제16장·‘이순신의 후견인’ 柳成龍의 향리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엘리자베스 여왕
문화재 당국의 沒歷史性

제17장·히데요시의 공갈외교
朝鮮의 上下를 깔본 倭使
외교적 儀典을 무시했던 히데요시
공갈외교를 감행한 까닭
倭使가 진상한 鳥銃을 창고에 처박아 두다
모병 현장에 과거준비 위해 試卷 들고 와

제18장·用兵을 모르면 敵에게 나라를 내주는 것
방어의 요충 鳥嶺을 지키지 않고
사격과 기동에 능숙했던 왜군
평안도인가, 함경도인가
“用兵을 봄에 들놀이 하듯 해서야”

제19장·對간첩작전
“왜가 병법을 모른다”
倭의 첩자를 일망타진
결전을 회피한 明의 구원군
南溟 문하생 출신 義兵들이 잘 싸운 까닭
砲樓 공사 중단해 쉽게 공략당했던 晉州城
중강진 開市로 戰時경제 운영
왜적 방어에 효과적인 ‘戚繼光 병법’ 활용

제20장·포퓰리즘이 횡행하는 그때와 오늘
적의 모략전에 넘어간 조정
서애의 失脚과 《징비록》 집필
대한민국의 갈 길을 묻고 싶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