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워싱턴 지국장이 쓴 칼럼  사설 <오바마 보러 갔다 진짜 본 것>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 대선은 리먼 브러더스가 무너진 날 이미 끝난 것이었다. 그날부터 투표일까지는 그저 "혹시" 하는 기간이었고 결과는 "역시"였다. 다 끝난 선거의 마지막 유세를 보러 간 것은 오바마의 육성을 한번 듣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날부터 2주일이 더 지난 지금까지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오바마의 육성이 아니다.

    오바마는 선거 전날 밤 마지막 유세를 격전지 버지니아의 프린스 윌리암에서 벌였다. 밤 10시 유세에 맞춰 일찍 길을 나섰지만 꽉 막힌 고속도로가 심상치 않았다. 다른 길은 다 뚫려 있는데 프린스 윌리암으로 가는 쪽만 막혔다.

    고속도로 출구에서 유세장까지 10여㎞는 한국 추석 귀성길을 방불케 했다. 하루 전 본 공화당 매케인 유세장은 이에 비하면 '장난'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차를 놔두고 걸었다. 깜깜한 밤 속을 그들과 함께 걸으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양한 언어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인 영어, 흑인 영어, 스페인어, 동남아시아권 언어에다 러시아어나 동구권어, 인도어처럼 들리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어느 때는 영어보다 다른 언어가 더 많이 들리는 듯했다. 여기가 미국인가 싶을 정도였다.

    유세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수만 명이 운집해 있었다. 다섯 시간 전부터 들어찼다고 한다. 주변에선 커피 장사, 핫도그 장사가 한창이고 그 사이를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녔다. 한국에서도 오래 전에 사라진 초대형 선거 유세를 미국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군중은 대략 세 사람에 한 명꼴로 소수 인종이었다. 그들이 이 선거에서 무엇을 열망하고 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선거에 관심이 없던 많은 우리 교포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투표장으로 나가 오바마를 찍은 이유도 같은 것이었다.

    과거 미국에서 소수 인종들의 이런 열망은 헛된 꿈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고 앞으로는 더 달라진다. 오바마 때문이 아니다. 1976년 미국 대선 때 투표자 중 90%가 백인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백인 투표자 비율은 75%로 떨어졌다. 32년 사이에 미국 인구 구성이 이렇게 달라졌다. 공화당 매케인이 얻은 표는 90%가 백인 표였지만, 오바마 표는 백인 표 외에 흑인 23%, 히스패닉 11%, 아시안 2%, 기타 인종 3%의 연합이었다. 이 다인종 연합군이 백인 집단을 처음으로 물리쳤다.

    미국에선 지금의 추세가 계속되면 2044년에는 백인 투표자 비율이 50%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그때면 백인을 'majority'(다수)라고 부를 수 없다는 얘기다. 이번 선거는 미국 인구 구성의 극적인 변화가 드디어 선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가 61%에 달하는 백인 표 없이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유세장에서 본 이 백인들은 화가 난 사람들이었다. 오바마가 "나는 연봉 25만 달러 이상인 사람들의 세금을 올리려는데 공화당은 국민 부담이 커진다고 비난한다. 국민이라니, 몇 퍼센트 국민인가. 여러분 중에 25만 달러 이상 버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라"고 했을 때 엄청난 호응이 일어났다. 옆에 있던 백인은 "25만 달러?"라면서 육두문자로 욕을 했다.

    지금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택 압류는 피도 눈물도 없다. 처리반이 들이닥치면 한 가족이 살던 집은 순식간에 텅 빈 다른 집으로 변형되고 앞 마당엔 "집 팝니다"는 팻말이 꽂힌다. 정리해고도 그에 못지않다. 어느 날 윗사람이 불러 갑자기 회사 출입증을 뺏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미국에선 현재 매달 십 수만 명이 개인 파산하고 있고, 그중 상당수는 가족 병원비 때문에 파산하는 경우다. 수많은 가정들이 이렇게 무너지는 한편에서 CEO들은 근로자 평균 연봉의 500배를 받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기업에서나 쓰이던 대형 금고가 부잣집들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이런 미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오바마가 내건 "바꾸자"는 구호가 만나자 해일(海溢)이 됐다.

    미국은 인구적인 측면에서 놀라운 속도로 백인 국가가 아닌 나라가 돼가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백인 사회에까지 경제적 고통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지고 있다. 모두가 전례 없는 상황이다. 미국의 이번 선거는 혁명의 끝이 아니라 앞으로 미국 사회가 걸어 갈 진짜 혁명적 변화의 전조(前兆)에 불과할 수 있다. 그 소용돌이의 여파가 태평양 건너까지 밀어닥칠 것도 분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