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만나기로 한 김일성 급사! 김정일이 지 애비 죽였다는 이야기도...
  • 베리아는
    스탈린을 독살(毒殺)하였는가?


    趙甲濟    

    스탈린의 최후

    베리아는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 일부 대북(對北)전문가들과 탈북자 사이에선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떠 돈다.
    1994년 7월 김영삼(金泳三)-김일성 회담을 앞두고 부자(父子)간에 갈등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북한주민들의 참상을 비로소 알고는 아들을 불신(不信)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회담 준비를 지휘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 응급조치가 늦은 것도 김정일이 함정을 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사를 태운 헬리콥터가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던 중 추락한 사건도 음모로 본다. 

  • 1953년 3월5일에 죽은 스탈린을 둘러싼 미스터리도 많다.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가 독살(毒殺)하였다는 설(說)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
    스탈린은 5일간 의사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거의 방치된 상태에서 극심한 고통을 치르면서 죽어갔다.

    2월28일 스탈린은 측근들과 함께 크렘린 궁(宮)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 뒤 차로 10분 거리인 자신의 별장으로 옮겨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셨다.
    베리아, 말렌코프, 불가닌, 흐루시초프가 동석(同席)하였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에 의하면, 헤어질 때 스탈린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흐루시초프의 배를 쿡쿡 찌르면서 장난도 쳤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늦잠을 자도 오전 10시에 일어나서 경호원을 부르곤 하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오후가 되어도 기척이 없었다.
    경호원들은 부르지 않으면 내실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저녁 6시30분에 방에서 전등이 켜졌다.
    경호원들은 부르기를 기다렸지만 밤10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자, 겁이 난 경호원이 우편물을 전하는 척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스탈린은 침대에서 밑으로 떨어진 채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부서진 시계는 저녁 6시30분에 멈춰 있었다.
    스탈린은 알아들을 수 없는 呻吟(신음)소리를 냈다.

    경호원들은 직접 의사를 부를 수 없었다.
    당시 스탈린을 담당하던 의사들중 상당수는 붙들려가 '요인 독살(毒殺)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경호원은 국가안전부로 연락을 하였다.
    국가안전부 장관은 책임을 면하려고 "말렌코프와 베리아에게 알려라"고 했다. 

  • ▲ 1953년7월 미국 타임지 표지. 베리아 '인민의 적'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 1953년7월 미국 타임지 표지. 베리아 '인민의 적'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말렌코프는 전화를 받았으나, 베리아에게 연락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베리아는 여자들과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베리아는 경호원들에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베리아가 곧 별장에 도착하였다.
    스탈린은 그때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베리아는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는데 경호원들에게 "스탈린 동지가 잘 자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 모두 여기서 나가! 잠을 방해하지 말아!"라고 명령하였다.

    의사가 온 것은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시각(時刻)(오후6시30분)을 기준으로 하여 12시간 뒤였다.
    베리아는 나중에 몰로토프에게 "내가 그를 처치하였어. 내가 당신들 모두를 살린 거야"라고 말하였다(<몰로토프 회고록>).

    당시 스탈린은 공안(公安)기관을 장악한 베리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베리아가 너무 강해져 그 자신도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다.

    스탈린은 별장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5일간을 지냈다.
    베리아는 여러 정치국원이 병상(病床)을 지키고 있는 자리에서 스탈린에게 험담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스탈린의 의식이 돌아오는 듯하면, 달려가 무릎을 꿇고는 스탈린의 손에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 ▲ 6.25남침의 두 원흉 스탈린과 모택동. 스탈린 사망 직전 6.25때 사진.
    ▲ 6.25남침의 두 원흉 스탈린과 모택동. 스탈린 사망 직전 6.25때 사진.



    독살설(毒殺說)


    3월3일 의사들은 스탈린의 사망이 시간문제라고 진단하였다.
    베리아는 실권자(實權者)가 된 것처럼 행동하였고, 정치국원들도 묵묵히 따랐다.
    말렌코프와 베리아는 긴급 정치국 회의를 주도하고, 후임 수상에 말렌코프, 제1부수상에 베리아를 임명하기로 결의하였다.
    베리아는 내무부에 대한 통제권도 행사하기로 하였다.
    비밀경찰 등 여러 공안(公安)기관을 통합조정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스탈린의 죽음을 지켜본 그의 딸은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얼굴 모양이 변하고 검은 색이 되었다.
    입술이 검게 되었다.
    갑자기 눈을 떴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무서운 눈길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분노한 눈초리였다.
    아버지는 갑자기 손을 올리더니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저주하려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숨이 끊어졌다."


    이 순간 베리아는 방을 뛰쳐나가면서, 운전사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환희에 차 있었다.
    석 달 뒤 베리아를 거세하게 되는 흐루시초프는 "그의 얼굴은 빛났다"고 기억하였다.

    몇년 전 러시아 역사가 에드바드 라진스키는 스탈린이 죽을 때 경호원으로 일했던 사람을 찾아내 인터뷰를 하였다.
    경호원 로가체프는 의외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스탈린이 그날 "내가 부르기 전에는 방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한 것이 아니고, 그런 지시를 내린 이는 수석 경호원 흐루스탈레프였다는 것이다.

    라진스키는 베리아의 명령을 받은 흐루스탈레프가 스탈린에게 독(毒) 주사를 놓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베리아는 그래 놓고는 의사들의 응급처치도 고의로 방해한 것이란 추리였다. 


    흐루시초프의 공작


    1953년 3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죽었을 때, 형식상 후계자는 말렌코프 수상 겸 제1비서였으나 實權(실권)은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가 잡았다.

    베리아는 스탈린의 숙청을 지휘하여 수백 만 명을 죽이고 수용소에 보낸 惡魔(악마)였다.
    베리아는 스탈린이 죽자 때가 왔다고 기뻐했다.

    그는 그토록 숭배하던 스탈린을 공공연하게 욕하면서 동료 정치국원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베리아는 말렌코프와 흐루시초프를 포섭, 세 사람이 소련 공산당을 지도하자고 유혹했다.
    말렌코프는 사무적인 인물이었으나, 흐루시초프는 正義感(정의감)과 용기의 소유자였으며 권력투쟁의 비결을 아는 사람이었다. 

  • ▲ 흐루시초프.
    ▲ 흐루시초프.

    흐루시초프는 먼저 말렌코프를 포섭, '베리아를 제거해야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다른 정치국원들도 베리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으나, 비밀경찰과 경호병력을 장악한 그를 두려워했다.
    흐루시초프는 그 전에 이미 불가닌을 포섭한 상태였다.
    흐루시초프가 주도하여 다른 정치국원 포섭공작이 진행되었다.
    도청을 염려한 흐루시초프는 음모를 신속하게 진행해야 찬스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흐루시초프는, 한편으론 정치국 위원들에게 베리아가 고립되어 있음을 보여줘 용기를 주려고 하였다.
    그는 정치국 회의 때 여러 번 베리아의 제의를 정면에서 반박하였고, 그때마다 다른 정치국원들이 동조하였다.

    베리아를 두려워하던 모든 정치국원들이 흐루시초프와 말렌코프의 설득에 넘어갔다.

    문제는 체포작전이었다.
    말렌코프는 군(軍) 장성들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크레믈린 경호는 베리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군(軍) 장성들만이 무기를 들고 크레믈린 宮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베리아, 제거되다


    확대 정치국회의가 열렸다.
    말렌코프가 사회를 보았다.

    흐루시초프가 옆자리에 앉은 베리아를 反黨(반당)분자로 모는 연설을 시작하였다.
    베리아는 흐루시초프의 팔을 잡곤 "니키타, 뭘하는 거야?"라고 했다.
    흐루시초프는 "들으면 알 거야"라고 뿌리친 뒤 연설을 계속했다.

    그는 베리아가 간첩일 가능성이 있으며, 스탈린이 죽은 뒤 여러 가지로 반당(反黨)행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였다.
    흐루시초프는 "이런 그가 공산주의자일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다른 정치국원들도 베리아를 규탄하는 발언들을 쏟아놓았다.

    흐루시초프는 그를 모든 公職(공직)에서 해임하고 체포할 것을 제안하였다.
    다른 정치국원들도 찬동하였다.

    말렌코프는 책상 위의 단추를 눌렀다.
    군(軍) 장성들이 권총을 꺼내 들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말렌코프는 "수상의 자격으로 베리아를 체포할 것을 명령한다"고 말하였다.
    2차 대전의 영웅인 주코프 元帥(원수)가 권총을 겨누며 "손 들어!"라고 소리쳤다.
    베리아가 옆에 둔 가방에 손을 대는 것을 흐루시초프가 막았다.
    나중에 가방을 열어보니 총기는 들어 있지 않았다.

    베리아가 체포된 것은 스탈린이 죽은 지 석 달 뒤인 1953년 6월26일이었다.
    베리아와 그 부하들은 재판에서 死刑(사형)선고를 받은 뒤 그해 12월에 처형되었다.

    베리아 제거 공작(工作)을 주도한 흐루시초프는 곧 제1서기 및 수상으로 올라가더니, 1956년 2월 제20차 전당(全黨)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하는 연설을 하여 국제공산주의 세계를 뒤흔들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꿨다.


  • ▲ 김정은은 고모부 장성택에 의해 제거될까? 왼쪽부터 김정은, 고모 김경희, 고모부 장성택
    ▲ 김정은은 고모부 장성택에 의해 제거될까? 왼쪽부터 김정은, 고모 김경희, 고모부 장성택

    모택동(毛澤東)의 死後(사후), 문화혁명을 주도하였던 4인방은 한 달 안에 제거되었다.
    스탈린의 사후(死後) 석 달 안에 베리아는 제거되었다.

    둘 다 군부(軍部)가 체포조 역할을 하였다.

    神格化(신격화)된 두목이 사라지면 반드시 권력(權力)투쟁이 일어난다는 게 공산주의 체제의 한 법칙이다.

    김정은은 몇년을 버틸까?
    문제는 북한판 등소평(鄧小平)과 흐루시초프가 있는가이다.

    그이가 장성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