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륜의 막말, '신라는 민족사의 정통이 아니다'

    민족의 탄생을 가져온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고구려-발해 정통론 제기.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으로 연결될 수도...
    ‘안철수의 멘토’ 法輪(법륜)의 비뚤어진 역사觀…
    북한에 대해서도 우호적 입장 피력.

    趙成豪(조갑제닷컴)


      
      南北관계의 본질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삶의 방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북한정권이 민족사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는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이 없다. 대한민국 헌법도 이러한 역사관에 입각하여 북한지역을 대한민국 영토의 일부로 선언, 북한정권을 反국가단체로 규정한 것이다.
     
      ‘안철수의 멘토’로 알려진 승려 법륜(現 평화재단 이사장)은 신라 삼국통일의 의의를 貶下(폄하)하고 한반도 역사의 정통성이 고구려와 발해에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정권에 정통성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법륜은 1988년 ‘정토회’라는 참선과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단체를 설립했다. 정토회는 현재 한국 古代史(고대사) 기행과 역사강연 등을 기획, 청년들을 모으고 있다. 이 단체는 27개 국내 지부와 18개 해외 지부 등 대규모 조직을 갖추고 있다. 법륜은 또 2004년 평화재단을 설립, 통일문제에도 관여하고 있다. 이 단체는 북한 어린이에게 식량 보내기 등 對北(대북)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각종 보고서 발간과 세미나도 주관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안철수를 대권후보 반열에 올려놓는 데 영향을 끼친 ‘청춘콘서트’의 기획을 담당한 단체가 바로 평화재단이라고 한다. 법륜은 현재 평화재단을 비롯해 정토회, 좋은벗들, 에코붓다라는 단체의 이사장 직함을 갖고 있다.
       


  •   “신라는 민족사 정통의 자격 없어”

     
      법륜은 2009년 10월16일,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 제1부’ 강연에서 “신라는 민족사의 정통의 자격이 없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 이남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통일신라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즉시 발해는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된다. 발해가 없다고 보면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 있으나 발해를 놓고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구려의 정통성은 발해로 갔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처음에 독립적 연호를 썼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연호를 없앴다. 그래서 민족사 정통의 자격이 없다. 발해는 끝까지 연호를 쓰고 독립국가로서 위상을 가졌다.” (발언출처: 2010년 1월13일字 인터넷 <한겨레신문>)
     
      《삼국사기》‘광개토대왕’ 편에는 “광개토대왕이 재위 9년 봄 정월에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九年 春 正月, 王遣使入燕朝貢)”고 쓰여있다. 같은 책 안원왕(고구려 23대 왕) 本紀에도 “東魏(동위)에서 조서를 내려 왕에게 驃騎大將軍(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모두 이전과 같게 했다.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다(四年 東魏詔加王驃騎大將軍 餘悉如故 遣使入魏朝貢)”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도 중국의 제후국에 朝貢을 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 모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 倭(왜, 注: 일본)와 활발한 교역을 했으며, 이는 상호간의 조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 조공의 의미는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예물 등을 바치는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 생존차원에서의 교역이란 뜻이 더 정확하다. 그럼에도 법륜은 신라가 중국에 事大(사대)ㆍ굴종한 것처럼 묘사했다.
     
      법륜은 신라가 독자적 年號(연호)를 쓰다가 없앴다고 했지만, 사실 삼국 중 독자적 연호를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나라는 신라였다. 신라는 무려 114년간 7개의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 고구려는 5개의 연호를 사용했으나, 광개토대왕 때 사용했던 ‘永樂(영락)’이란 연호를 제외하고는 정확한 연대를 측정하기 어렵다. 백제는 확실하게 전해지는 연호가 아직 없다.
     
      법륜은 독자적인 연호를 폐지했다는 이유로 신라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절하했으나, 사실 신라는 황제국가로서의 位相(위상)을 지녔었다.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신라국왕의 황제적 위상’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국유사》‘태종춘추공조’에서 당대인들이 신라를 ‘聖代’라고 한 것은 신라를 이상국가로 일컬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太宗이라는 諡號(시호)는 황제의 시호였다. 이때 당에서 이 시호를 폐지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신라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황복사금동사리함명문에서 효소왕의 어머니를 ‘神穆太后’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朕(짐)이라 했고 죽음을 崩(붕)이라 했다.”
     
      金 연구원은 “신라 국왕이 주변국을 제후국에 봉했다”며 “耽羅國(탐라국)을 속국으로 朝貢(조공)을 받았고 고구려의 귀족 출신 安勝(안승)을 고구려왕(뒤에 報德國王)으로 책봉하고 表文(표문)을 받았으며 大祚榮이 발해를 건국하자 그를 大阿湌(대아찬)에 책봉하므로써 탐라와 報德國(보덕국)과 발해를 번국으로 설정하고 그 우두머리를 제후에 임명했다”고 밝혔다. 이는 신라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법륜은 같은 강연에서 고려 초, 徐熙(서희)가 거란의 蕭遜寧(소손녕)과 벌인 강동 6주 담판을 언급했다. 그는 “고려가 싸우지 않고도 외교술로 강동 6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올바른 역사관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신라 사람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없었다”고 자문자답했다. 그는 또 “광활한 대륙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 땅을 준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격했다”며 “신라는 문화적으로 뛰어나고 부유했지만 역사관이 부족해 이런 문제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발언출처: 上同).
     
      법륜은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영토를 下賜(하사)받은 것처럼 묘사했으나,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에서부터 원산만까지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唐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서였다.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해 羅唐전쟁에서의 결정적 勝機(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唐은 이 전투에서 패해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철수시키는 치욕을 당했다. 안동도호부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唐이 평양에 설치한 軍政(군정)기관으로, 옛 고구려領을 집어삼킬 의도로 설치한 기관이다. 초대 도호로 임명된 唐將(당장) 薛仁貴(설인귀)는 2만여의 군사와 함께 진주하면서 고구려 땅을 9都督部(도독부)·42州(주)·100현縣(현)으로 나누어 다스릴 방침이었다. 그러나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해 唐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법륜은 이런 사실관계는 간과한 채 민족사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왜곡하고 자학적으로 묘사했다.
       
      ‘신라 삼국통일’ 폄하는 북한이 조작ㆍ왜곡한 역사관과 相通(상통)

     
      법륜이 신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고 고구려와 발해에만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건 북한에 정통성을 주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의도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신라 이전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모호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민족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공통의 가치관, 풍습, 언어, 정치제도, 인종적 유사성을 가지고 함께 살아야 민족의식을 갖게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의식을 가진 민족집단이 생기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역사적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통일 후 약 250년간 富國强兵한 一流국가를 존속시켜 나갔다. 반면 발해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거란에 망한 이후 나라를 되찾지도 못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발해 문화는 전무하다. 언어, 성씨, 문화, 제도 중 현재까지 韓民族의 역사적 전통으로 이어지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신라가 확보한 한반도란 공간은 민족의 생존 터전이 되었다. 신라어는 한국어의 原型이 되었고, 신라불교ㆍ신라의 문화재ㆍ신라의 학문과 예술 등은 한국인의 현재의 삶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다. 발해가 아니라 신라가 민족사의 정통이란 이야기이다.
     
      고구려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신라를 부정하는 억지도 유행이다.

     
      고구려의 ‘對唐ㆍ對隋(대당ㆍ대수) 항쟁’을 들어 신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부 좌파 사학자들은 고구려가 긴 시간에 걸쳐 수나라와 당나라와 결전한 것을 근거로 민족사적 우수성과 자주성을 부각시키고 신라가 당이란 外勢(외세)를 빌어 고구려를 친 것을 비판한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민족이란 개념이 없었으므로 外勢란 말도 지금 의미로 쓰면 안 된다. 사실상 삼국은 서로 다른 민족들의 집합체였던 셈이다.
     
      고구려가 隋·唐과 싸워 한반도를 지켜낸 것은 사실이지만 신라가 당과 동맹한 것을 비판해선 안된다. 더구나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려는 당과 결전, 한반도를 민족의 공간으로 확보한 것을 폄하하는 것은 민족 생성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고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중국을 통일하고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한 강대국과 너무 오래 전쟁을 한 것은 고구려의 외교적ㆍ군사적 실패였다는 것이 학계의 衆論(중론)이다. 고구려가 兩國과 싸움을 벌여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결국 이 전쟁으로 망하여 한반도에서 역사적 大勢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대국과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
     
      신라의 金春秋(김춘추, 太宗武烈王)와 金庾信(김유신)은 뛰어난 외교력과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羅唐(나당)동맹을 결성,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주도했다. 이들은 통일 이후 唐과 결전을 벌여 이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신라가 外勢(외세)의 힘을 빌어 통일했다’는 비판이 설득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가변적 상태에 있던 한민족 국가들이 최초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로 탄생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안정된 영토’와 ‘안정된 국가’를 구심점으로 해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더 나아가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겼다. 민족적 정체성 확보는 통일신라가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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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가 우리 민족사의 大勢(대세)…발해는 支流(지류)
     
      故 李基白(이기백) 前 한림대 교수(2004년 별세, 前 국사편찬위원)는 한반도의 역사를 가장 객관적으로 연구한 학자로 꼽힌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서 수없이 많은 씨족공동체가 산재해 있었고, 청동기 시대에서는 각기 독립된 수백 개의 성읍국가 혹은 부족국가들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복과 동맹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로 통합 정리되어 삼국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신라의 통일에 의해 민족의 틀이 거의 완성된 것입니다” (발언출처: <月刊朝鮮> 2001년 11월호 인터뷰)
     
      그는 “통일신라가 우리 민족사에서 大勢(대세)를 차지했고, 발해는 支流(지류)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李 교수는 또 신라가 唐과 동맹한 것을 ‘反민족적 事大(사대)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는 시각”이라며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하기를 원했지만, 고구려가 거절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唐과 동맹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정권도 법륜의 주장처럼 고구려와 발해에 역사적 정통성이 있다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줄곧 폄하해왔다. 이 같은 역사의식의 뿌리는 日帝시대 申采浩(신채호) 같은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定說(정설)이다.
     
      신채호는 反외세ㆍ反제국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사관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방편 중 하나로 고조선과 부여의 역사 등 上古史(상고사) 연구에 주력했다. 그 결과 부여와 고구려, 발해에 역사적 정통성이 있다고 본 반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外勢를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하거나 평가절하 했다. 신채호는 자신의 著書 《朝鮮上古史(조선상고사)》 11편에서 “김유신의 음모로 고구려의 古土를 잃었다”고 했다. ‘신채호類(류)’의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때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으나, 건국 이후 남북한 대치 상태가 지속되면서 북한의 역사왜곡에 빌미를 주었다.
       
      北의 ‘신라 삼국통일’ 폄하는 ‘대한민국=미국과 결탁한 反민족적 정권’이라고 매도하기 위한 것
     
      ‘김일성 王朝’인 북한은, 자신들의 異端性(이단성)에 정통성을 덧입히고자 역사를 왜곡ㆍ조작했다. 북한정권은 자신들이 ‘고조선-고구려-발해’를 계승했다고 강변하며 민족주의 사관을 惡用(악용)했다.
     
      북한이 펴낸 1991년版(판)《조선통사》는 “저들의 영토 야욕을 채우려고 외래 침략세력을 끌어들인 신라 봉건 통치배”로 평가절하하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강성대국 발해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유신과 김춘추를, 外勢를 끌어들인 ‘反민족적 봉건통치배’로 비난했다. 이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부각시키고자 ‘북한정권=주체정권’, ‘대한민국=미국과 결탁한 反민족적 정권’으로 매도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실제로 2001년 6월15일, 북한의 <평양방송>은 1960년 김정일이 썼다고 주장하는 ‘삼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다.
     
      방송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근거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통일적인 주권국가’를 세우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논문은 “신라 통치배들은 령토를 넓히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당나라의 침략세력을 끌어들이는 죄악적인 행동을 감행했다”고 비난했다. 또 “그는 당나라 통치배들과 신라와 당나라가 련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대동강 이남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 이북의 넓은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차지할 것으로 흥정했다”고도 했다.
       
      반면, 이 논문은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시각을 보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서 삼국을 통일하려는 지향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려온 나라는 고구려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7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한국통일연구원 이교덕 연구원은 2010년 2월2일 <자유아시아방송>에서 발해의 성격에 대해 언급했다. 李 연구원은 “우리 국사학계에서는 발해가 우리나라냐,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될 수 있는 국가냐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며 “발해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국가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성격이 우리나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김창진 고려대 사학과 교수도 同年 7월13일 같은 매체에서 북한의 ‘발해正統論’에 대해 “정권자체가 북쪽에 있다 보니 그런 것 같다”고 설명했다. 金 교수는 “북한 정권의 특색이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주체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더욱더 정통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며 “지도자의 입장을 강조하고 그러다 보니 지도자의 정통성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단군 遺骸(유해)’ 발견됐다고 거짓말한 북한의 底意(저의)
     
      李基白 교수도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역설하면서 “독재국가(注: 북한)는 한국사에서의 정통성을 주장할 자격이 없다. 그 독재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이른바 ‘주체사학’은 한국사학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일례로 북한정권은 1993년 단군 遺骸(유해)가 발견됐다며 대대적인 체제선전을 했다. 이후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에 ‘단군릉’을 조성하고 북한정권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처럼 조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사학자들은 단군의 遺骸가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李 교수는 북한이 단군 유해 측정에 사용했다는 ESR(Electron Spin Resonance, 전자 스핀 공명) 측정법에 의문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ESR 측정법은 대략 10만년 이전의 구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해 응용되고 있으며, 5000년 전 정도의 ‘나이 어린 뼈’를 試料(시료)로 한 분석에서는 정확한 연대측정을 기대할 수 없는 방식이다.”
     
      그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李鮮鰒(이선복)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5000년 전 정도의 뼈라면 ‘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한 보다 정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터인데, 북한 측에서 굳이 ESR측정법을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고 밝혔다. 탄소연대측정에서 어린 뼈가 나왔기 때문에 측정결과를 상대적으로 쉽게 조작할 수 있는 ESR 측정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법륜, ‘천부인’ 언급하며 고조선 이전부터 청동기 사용했다고 강변

     
      법륜도 고조선 역사와 그 이전의 桓因(환인)과 桓雄(환웅)에 대해서도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한반도의 민족사의 흐름을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 해모수의 부여, 고주몽의 고구려, 왕건의 고려, 이성계의 조선”이라고 주장했었다(발언출처: 2009년 10월16일,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 제1부’). 또 ‘청년, 역사를 만나다 제2부 강연’에서는 환웅의 神市(신시) 건설을 언급하며 ‘天符印(천부인)’에 대해 설명했다. 천부인은 환인이 환웅에게 下賜(하사)한 것으로 환웅이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왔다는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을 말한다. 법륜은 이를 근거로 “이들이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를 바탕으로 한 하나의 說(설)로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 사실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법륜의 주장대로라면, 고조선 이전 환웅의 시대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되므로 이는 역사의 흐름 상 앞뒤가 맞지 않다.
     
      북한정권도 단군릉을 복원할 때 그 안에서 金銅冠(금동관)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문명사적으로 보았을 때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획기적인 大발견이라고 한다. 李基白 교수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반도에서는 황하유역에서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한 때보다 1000년 이전에 이미 고도의 청동금속문명이 등장했음을 의미한다”며 북한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청동기가 발명된 이후부터 다른 부족을 征伐(정벌)할 수 있게 되었고, 농경지도 일굴 수 있게 돼 문명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李 교수도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에 대해 “청동기 시대 이후여야 하므로 기원전 10세기 경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신석기 시대에 국가를 세웠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장가도 들었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법륜의 시각에서 북한은 ‘포용하고 감싸안아야 할 대상’일 뿐
     
      법륜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매우 우호적이다. 북한정권에 대한 비판도 찾아보기 힘들며 그의 시각에서 북한은 ‘포용하고 감싸안아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강연에서 북한이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북쪽에 있는 저 북한은 현재 우리하고 먼 것 같지만 북한 국호가 무엇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럼 이 조선은 어디서 왔는가? 조선왕국에서 왔다. 왕이 주인인 국가에서 저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기 때문에 첫째는 專制(전제)정치가 아니고, 民主(민주)정치다. 그 다음에 왕이 주인이 아니고 民이 주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붙였다.” (발언출처: ‘청년, 역사를 만나다 제1부’ 강연 中)
     
      그는 “청나라나 원나라는 우리와 한참 올라가도 만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라고 말한다”면서 “북한은 우리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정권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법륜은 북한정권이 자행한 대량학살을 비롯한 집단餓死(아사), 건국 이후 김일성 父子가 저지른 수 백여 건의 南侵(남침) 사례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2012년 8월1일, 김미영 세이지코리아 대표(前 한동대 교수)는 <조갑제닷컴>에 기고한 칼럼에서 법륜이 과거 자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이 글을 쓸 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슬쩍 뽑아 옆으로 치워두었다. 13년 만에 이제 공개하게 되는 그 사실이란 당시 법륜스님을 서초동 정토회에서 만났을 때 ‘그래도 정통성은 북한에 있지’라고 했던 말이었다.”
       
      법륜의 비뚤어진 역사관과 대북관이 안철수에게도?
     
      법륜은 2005년 10월15일 열린 ‘햇볕정책을 넘어 평화로 통일로’라는 토론회에서도 “평화통일로 나아가려면 북이 주장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든 우리 측에서 주장하는 ‘남북연합’이든 서로 얼마든지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헌법의 영토조항 및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주장했다.
     
      그는 2007년 9월, 尹汝雋(윤여준) 前 의원과 가진 대담에서도 “우리가 북한을 단순히 남한과의 대립 관계로만 봐서는 안된다. 북한을 우리 역사의 범위 안에서 어떻게 다룰 거냐 이렇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말은 북한에 동조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북한을 남이 아닌 우리 가족의 일부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발언출처: 2007년 9월14일 ‘윤여준의 정치카페’ (http://www.yooncafe.net/78)]
     
      법륜은 또 평화재단이 개최한 2008년 7월10일 ‘건국 60주년 통일코리아를 바라보다’ 토론회에서 ‘9도 연방제’를 제안했다. 그는 “남한을 서울과 5도로 나누어 연방 형태를 준비하고 북한을 3도로 나누는 것”으로 “남과 북이 ‘헤쳐모여’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고 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 제4조(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에 反하는 違憲的(위헌적) 주장이다. 연방제 통일은 북한의 對南 적화공작의 일환이기도 하다.
      
      법륜은 大權주자로 부상하고 있는 안철수의 멘토로 알려져 있다. 안철수가 법륜과 동일한 역사관을 가졌다는 증거는 아직 확인이 안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법륜의 비뚤어진 역사관과 대북관이 자칫 安씨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