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창중 칼럼세상>

     독자 동지 여러분께! 엄숙히 신고합니다


  • 시계가 저녁 8시45분을 가리키는 시각. <윤창중 칼럼세상>의 독자 방문자 숫자를 알리는 계기판이 스르르 돌아갑니다. 독자 방문자 숫자-30만명! 이 엄청난 숫자의 독자 동지들께서 찾아주시다니! 솔직히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지독히 추웠던 4월12일 오전 11시, 저는 감히 네이버에 <윤창중 칼럼세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첫 칼럼을 띄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첫 칼럼을 띄운 지 5개월 하룻만에 무려 30만 건의 방문자 숫자가 눈앞에 선명히 나타났습니다.

    신문사에서 정처 없이 나와 황야의 한 복판에 서서 첫 글을 올리는 것, 그러나 그건 제 스스로도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뭘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선 나 자신부터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부 기자 17년, 정치담당 논설위원·논설실장 13년 모두 30년의 언론사 생활을 일순 청산하고, 오로지 나 홀로 새로운 인생을 헤쳐 나간다는 것-너무나 막막했습니다.

    며칠이고 드러누워 자고, 또 자고.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면서 하루하루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지요.
    너? 사나이라고 큰 소리 치며 살아왔잖아? 너? 대한민국에 애국하는 걸 평생 신조로 믿고 살아왔잖아? 네가 네 자신에게 한 말이잖아? 네 나이 56, 이걸로 끝낼 수는 없잖아? 그래 다시 글을 쓰자, 방송에 나가 나의 주장을 말하자!

    이런 각오를 하고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분노의 땀이었습니다.
    내가 신문사에서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치욕에 대한 분노! 그 분노에 놀라 깨보면 잠자리까지 땀으로 젖어 있는 걸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습니다. 신문사에서 나와 그렇게 며칠을 보내던 중, 저를 흔들어 깨운 건 <문화일보>에서 글을 쓸 때 제 칼럼을 사랑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수많은 독자 여러분들이셨습니다.

    이 분들은 제 근황을 수소문해 저에게 눈물겨운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통감했습니다. 인간을 얽어매는 건 ‘피’보다 ‘가치의 공유’이구나! 절감하고 절감했지요. 어떤 독자분께서는 제가 신문사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매일 아침 ‘정화수(井華水)’ 떠놓고 백일기도까지 시작했습니다. 이 정성! 이 사랑! 가슴 속에선 빗물처럼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런 얼굴도 모르는 독자분들! 그리고 인생과 사회의 선배님들! 이 분들께 누가 될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몇 분만 더 말씀 드릴까 합니다.

    제가 지난해 12월29일 회사에 사표를 쓰고 나왔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신 선배는 ‘국민 아나운서’로서 평생 언론계에 종사하시고 계시는 김동건 선배님이셨습니다. 1월2일 아침,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몰고 나갔다가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에 들렸을 때 였습니다. 김 선배님은 “지금 어디야? 다음 주 월요일에는 무슨 칼럼이 나와?” 처음엔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시고 하시는 말씀인 줄 알고 예, 예 하고 답하다가 아무래도 사실을 말씀 드려야겠기에 신문사를 떠났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미 다 알고 계셨으면서도 제가 다시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걸 알아채게 됐습니다.

    “그래, 그래요. 빨리 만나 얼굴이라도 봅시다.”

    애써 위로를 보내주셨지만 크게 낙망하시는 느낌이 전해졌습니다.

    국민행동본부의 서정갑 회장님의 연락이 왔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나요. 빨리 만납시다.”

    “회장님, 잠시 쉬어야겠습니다. 제가 연락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됩니다. 빨리 만납시다.”

    그러시면서 날짜와 장소까지 정해 버렸습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더니 에스컬레이터에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선배님이 타고 계셨습니다.

    “조 선배님?”

    “아아아, 서정갑 회장이 윤 선생 만난다는 소식 듣고 같이 만나려고 가고 있어요.”

    서정갑 회장님과 조갑제 선배님께서는 땅이 꺼져라 걱정하시는 표정이었습니다. 정말 이토록 진심어린 걱정들을 해주시다니. 저는 조금 쉬다가 아무래도 글을 다시 쓰는 언론인 생활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조 선배님께서는 “절대 은퇴한 사람처럼 생활하거나 사라지면 안 됩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조 선배님은 1993년 제가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월간조선에 ‘청와대 사람들’이라는 인터뷰 기획 연재를 통해 김영삼 정권의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의 인터뷰 기사를 기고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조 선배님은 형식적으로 흔히 언론계 선배를 넘어 제 마음 속으로는 대한민국을 함께 지키는 ‘선배 동지’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빨리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그 큰 키와 몸집에서 걱정의 한 숨이 터져 나오는 듯 한 목소리! 광화문 근처 중국집에서 뵙고 연태 고량주로 통음했습니다. 큰 것 한 병이 모자라 작은 것 한 병을 더 마셨지요.

    남 사장님은 제가 문화일보에 논설위원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회사에서 나가셨지만 제 글을 늘 애독해 오신 분이십니다. 남 사장님은 이런 저런 고민을 깊이 하시는 표정을 이으시면서 “글을 써야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택시를 타고 떠나시는 남 사장님의 옆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통곡했습니다. 너무 고마우신 언론계 선배님이시다!

    정국은 4·11 총선으로 시끄러웠지만, 계속 쉬어야겠다는 판단에서 활동을 재개하는 날짜를 계속 미뤘습니다. 그야말로 내 영혼은 빈잔이었습니다. 텅텅 빈 빈잔! 105일의 절필!

    4월12일 오전 9시, 준비해 둔 광화문 집필실로 출근해 2시간 동안 칼럼을 만들어 오전 11시 <윤창중 칼럼세상>이라는 이름으로 첫 칼럼 ‘프롤로그:나의 4월 투쟁선언’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시간 후 조갑제 선배님께서 <조갑제닷컴>에 이 글을 올리셨고, 이를 본 <뉴데일리>의 인보길 사장님께서 이 글을 또 올리셨습니다. 그렇게 <윤창중 칼럼세상>은 세상에 알려져 <윤창중 칼럼세상>을 찾아오신 방문자 숫자가 오늘 30만명을 기록했습니다. 다른 인터넷, 트위터, 페이스북에 오른 것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알 수 없을 겁니다.

    류근일 선배님께서 칼럼이 몇 차례 나간 뒤 광화문 근처에서 점심 식사를 사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게릴라다. 우리는 투사다. 매일 글을 써야 한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난 5개월 동안 게릴라, 투사로 살아왔습니다. 엄청난 욕과 비난과 인신공격 속에서도 저와 함께 한 <윤창중 칼럼세상> 독자 동지 여러분들의 성원과 지지를 굳게 믿으면서. 굳게굳게! 저는 결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게릴라가 되겠습니다. 투사가 되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윤창중 칼럼세상>을 독자 동지 여러분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국가 중심세력의 정신적 거처’로 남기겠습니다.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더욱 겸손하겠습니다. 그리고 더욱 치열하겠습니다.

    신고합니다. 2012년 9월13일 <윤창중 칼럼세상> 방문자 숫자 30만명 기록!

     

    윤창중 칼럼세상 대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