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윤리 파산' 신고했다

    허문도 /전 통일부장관
  • "아베의 발언으로 일본은 윤리적 파산신고를 했습니다.”
    지난 8월 29일 만난 허문도(72) 전 통일부 장관은 이날 아침 조간신문에 실린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일본 총리의 발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경술국치 102주년을 맞은 이날 조간신문들은 9월 총재 선거에서 자민당 대표로 유력한 아베 전 총리가 “집권 땐 과거사 반성 3대 담화를 수정하겠다”고 말한 것을 대서특필했다.

    허 전 장관은 “아베의 발언은 자기들 표현대로 ‘하산(下山)’하는 나라, 내 표현으로는 ‘기(氣)가 빠지는 나라’의 마지막 몸부림 같은 것”이라며 “내셔널리즘에 불을 지피기 위해 지금까지 해온 과거사 사과 시늉 같은 윤리적 포즈는 체질에 맞지 않아 이제 다 집어치우겠다고 선언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윤리적 지진아”
      
       허 전 장관은 일본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일본통(通)’으로 통한다. 1970년대 도쿄대학에서 6년간 공부했고 조선일보 도쿄특파원과 주일대사관 공보관을 지냈다. 1980년대 교과서 파동, 60억달러 차관 등 대일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허 전 장관은 기본적으로 일본을 “윤리적 진화가 덜 된 나라”로 평가한다.

    “일본 정치인들은 우리보다 역사 공부를 더 많이 하지만 자신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10년 단위로 전쟁을 해온 나라입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그들은 서양을 받아들이면서도 휴머니즘과 윤리관 같은 본질은 보지 못하고 무력만 봤습니다. 힘과 이익만 중시하지, 보편적 윤리 개념을 한번도 체화(體化)시키지 못한 나라가 일본입니다. 동양문명의 고도 단계인 덕(德)과 인(仁), 도(道)의 근본에 이르지 못한 나라가 일본입니다. 주자학(朱子學)을 받아들여 그 정점에 이르렀던 우리와는 문화가 너무나 다릅니다.”
      
       허 전 장관에 따르면, 현대사에서 ‘윤리적 지진아’를 벗어나지 못한 일본의 불행은 독일과 달리 전후 청산을 제대로 못하고 다음 역사 시대를 맞이했다는 데 있다. “전후 독일은 진심 어린 사죄를 하며 주변국의 마음을 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새 한·일 관계의 출발점이어야 할 대한제국 강제병합에 대한 무효선언을 비롯해 한 번도 진심 어린 사죄를 한 적이 없습니다. 특히 미 군정은 점령 통치의 편의와 일본을 냉전의 반공 보루(堡壘)로 삼기 위해 군사적 파시즘의 정점에 있던 일왕에게 면책(免責)을 허용함으로써 과거 청산을 처음부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허 전 장관은 “독일에서는 나치 치하에서도 교회의 정신적 권위를 양보 없는 원칙으로 다짐한 신학자 칼 발트의 ‘발멘(Barmen)선언’(1934년)과 죽음을 무릅쓰고 나치에 저항한 개신교 목사들을 비롯해 파시즘에 저항한 지식인의 전통이 있었지만 일본은 천황제 군사 파시즘에 대한 지식인들의 원천적 비판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전후에 일본의 좌파나 양심적 지식인들이 미 군정 당시 만든 평화헌법에 맞지 않는 일본의 과거사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영광스러운 과거사’를 버릴 수 없다는 일본의 보편적 대중 심리와 문화에 결국은 묻혀버리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잘못된 과거청산 JP는 참회해야”
      
       일본의 전후 처리가 부실하게 끝난 데는 피해 당사자인 우리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과거 청산을 하는 돈으로 근대화·산업화를 하자는 박정희의 전략은 옳았지만, 돈을 받는 데 급해 결정적 과거를 덮은 것은 잘못입니다. 한·일 강제병합 원천무효 선언과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사과, 그리고 독도 주권은 확실히 받아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김(종필)·오히라 메모’에서 보듯 JP(김종필)는 이를 눈감고 돈을 받은 것입니다. 이를 이용해 일본은 한일협정 조문 하나로 과거사를 모두 덮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받는 것인데도 당시 일본 정계 지도자들은 사죄는 고사하고 우리에게 주는 돈을 ‘독립 축하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당시 전권을 갖고 협상을 한 JP가 지금이라도 역사 앞에 참회를 해야 합니다.”
      
       허 전 장관은 당시 군사정권의 졸속 협상은 이승만 대통령이 보여준 태도와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지적도 했다. “미국은 일본을 끌어들여 반공전선을 구축하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압박했지만, 이 대통령은 한일병합 원천무효 선언 없이 국교 정상화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오히려 독도 평화선을 그으며 일본을 역습했고 우리의 외교 지렛대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 없이는 예산을 편성하지도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실제 미국은 이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해 원조 집행 중단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1952년부터 1960년까지 8년간 미국의 압력을 견뎌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대일 청구권의 ‘판돈’을 키운 것입니다.”
          
       “파산자 몸부림에 대꾸할 필요 없다”
      
       허 전 장관은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일본이 한일병합 무효 선언 등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했더라면 일본을 위해서도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진심 어린 사과는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 절차를 밟음으로써 일본이 윤리적으로 재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런 절차를 한 번도 밟지 않았고 스스로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해 아세안(ASEAN) 등에 그렇게 돈을 퍼부었어도 결국 한 표도 얻지 못한 게 일본의 현주소입니다.”
      
       허 전 장관은 국제적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일본의 실체와 관련해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한 서양 전문가들의 통찰을 강조하기도 했다.
    “라이샤워 교수는 일본의 가장 큰 특징을 ‘격절감(隔絕感)’이라는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일본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섞여 있다 하더라도 항상 일본 사람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국제화가 원천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죠. 1980년대 일본이 경제 호황을 누릴 때도 라이샤워 교수는 일본의 이런 특질로 말미암아 일본의 경제적 성공이 세계 경제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고 국제적 언밸런스(unbalance)만 키우다 추락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민주주의의 교사’라며 일본인이 그렇게 떠받들던 맥아더 장군도 일본 점령군 사령관을 마치고 미국 의회 청문회에 서서는 ‘일본의 정신연령이 12세’라고 평가했습니다. 철이 덜 든 아이들 같아서 전쟁포기를 선언하는 평화헌법이라는 12살에 맞는 옷을 입힐 수밖에 없었다는 함축일 겁니다. 일본 문명의 고립성과 외톨이성을 강조한 새무얼 헌팅턴 교수도 국외자를 향해서는 단결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국(大國)에 올라타는 전략을 취해온 일본을 ‘문명적 의리를 모르는 문명’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헌팅턴 교수의 지적대로 2020년경 중국과 미국의 GDP가 비슷해지면 일본은 미국을 버리고 중국에 붙을 가능성이 큽니다.”
      
       허 전 장관은 극일(克日)의 길을 걸어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번 사태를 일본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알고 그런 나라 옆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로 삼으면 그뿐, 일본과의 입씨름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우리의 길을 걸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윤리적 파산신고까지 하는 것은 그들의 과거와 그들 스스로가 씨름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파산자의 몸부림에 일일이 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 3명 낳으면 10년 내 일본 이긴다”
      
       허 전 장관은 일본과의 숙명적 대결에서 승기(勝機)는 우리가 쥐고 있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지금 공황상태입니다. 인기작가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의 ‘하산(下山)의 사상’도 있지만, 심심찮게 21세기 일본 문명의 하산 기조가 입에 오르고 있습니다. 무연(無緣)사회, 무목표사회, 희망격차사회 등의 표현으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氣)가 줄어들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희망격차사회라는 말은 모든 게 다 있지만 희망만 없는 나라라는 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일본이 국기(國技)로 여기고 있는 유도 7체급에서 남자 선수가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반면 우리는 기가 살아 있고, 특히 국제사회에서는 지금부터입니다. 앞으로 일본과의 경쟁은 소득수준이 올라가고 있는 중국 등 제3세계의 시장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핵심인데, 피침략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 국가들과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이 아닌 우리입니다.”
      
       허 전 장관은 “일본과의 숙명적 한판 대결에서 앞장설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우리 대기업인데 지금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다 뭐다 하면서 강을 건너는 중 말을 바꿔타려는 우를 범하는 것 같아 걱정된다”며 “2009년부터 3년간 대일 무역적자가 매년 평균 300억달러에 이른다는 엄중한 현실을 이번 계기에 바로 보고 정치권도 재벌을 그냥 건드릴 게 아니라 기술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짐을 지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 전 장관은 “우리 젊은이들이 독도 갖고 흥분할 양이면 결혼해 아이를 3명씩만 낳으면 10년 안에 확실한 극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간조선 2012.9.3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