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것들'에 ‘개XX들(Sons of Bitch)’ 외친 美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 살렸다!
  • 지난 26일 KBS 1TV의 ‘심야토론’에서 '쇠직구' 전원책 변호사(자유기업원장)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면 김정일 개새끼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발언한 것으로 인터넷이 떠들썩하다.

    인터넷 등의 반응을 보면 전원책 변호사의 발언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들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 변호사의 발언이 ‘사랑스러운 개를 모욕했다’며 발끈하는 모습이다.

    몇몇 동물을 사랑하는 네티즌들은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블로그에 올린 뒤 “아무리 말 못하는 동물이라 해도 그 따위 것들과 비교를 하시는 건 너무하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 ▲ 몇몇 블로거는
    ▲ 몇몇 블로거는 "전원책, 당신은 강아지를 모욕했어. 어떻게 김정일 따위와 비교를 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들의 반발은 ‘심야토론’ 당시 전 변호사의 ‘김정일 개새끼’ 발언이 끝나자마자 “정말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잘 모르신다”고 발끈한 조기숙 이대 교수의 ‘주장’과는 전혀 달라 보인다.

    사실 김정일과 그 애비를 ‘개새끼’라고 부르는 건 우리나라와 미국에서는 ‘오랜 전통’이었다(6.25 남침 당시 우리나라를 도운 60여개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리라).

    미국 시간으로 1950년 6월 24일 저녁,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에 가 있던 해리 S. 트루먼 美대통령은 딘 에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한반도 38선 전역(全域)에서 공산군이 남침했다”는 전화 보고를 받았다.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매우 유명한 욕설을 내뱉는다.

    “딘, 그 개새끼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트루먼 대통령의 이 분노에 찬 ‘김일성 개새끼’ 발언이 결국 우리나라를 살렸다. 만약 트루먼 대통령이 딘 장관의 전화를 받고선 “참, 안됐네. 하지만 이미 거기선 우리 미군도 철수했고, 합참도 어쩔 수 없다고 하니, 일단 유엔과 상의해 대충 처리하자”라고 말했다면 지금 우리는 '평양 것들'의 구호와 김일성 3대의 초상화 아래 신음하고 있으리라.

    故박정희 대통령도 김일성과 김정일을 가리켜 ‘개새끼’라고 불렀다.

    1976년 8월 당시 유엔군이 북한군 초소를 가린 미루나무 가지를 다듬으려 했을 때 북한군이 달려들어 한국군과 미군 장교 등을 도끼로 살해했다. 이 사건 직후 박정희 대통령은 공식 연설에서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강력 경고한 뒤 미국과 함께 미루나무 제거작전을 감행한다.

  • ▲ 전방 전선을 담당하는 육군3사단에 붙은 구호. 평양 것들을 부를 때는 이 구호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 전방 전선을 담당하는 육군3사단에 붙은 구호. 평양 것들을 부를 때는 이 구호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당시 우리 특전사 요원들이 미루나무를 직접 제거하고, 미군은 전략폭격기와 항모전단을 긴급 투입해 한반도 주변에서 비상대기하고 있었다. 서슬 퍼런 한미 양국의 분노에 ‘개새끼 김일성’은 결국 ‘꼬리’를 내리고 공식 사과 했다.

    2010년 4월 천안함 폭침, 같은 해 11월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우리 군에서도 '평양 것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백골부대’로 잘 알려진 육군 3사단은 아예 부대에다 ‘김정일 부자(父子)는 미친 개. 북괴군의 가슴팍에 총칼을 박자’란 구호를 붙여놓고 다짐을 한다.

    이러니 동물 애호인이나 몇몇 시민들이 '김정일-김정은 평양 것들'을 ‘개만도 못한 존재’로 보는 것도 당연하다.

  • ▲ 전원책 변호사의 '김정일 개XX' 발언 이후 네티즌들이 만든 패러디.
    ▲ 전원책 변호사의 '김정일 개XX' 발언 이후 네티즌들이 만든 패러디.

    하기사 3대 세습을 하는 왕조 주제에 ‘민주주의’라고 주장하고, 주민 300만 명을 굶겨죽인 뒤에도 “괜찮아, 평양만 있으면 돼”라며 주민들을 착취하던 김정일, 군 생활도 제대로 안하고선 연평도 도발을 주도한 김정은을 어디 감히 ‘인간의 벗’인 강아지에 비할 수 있으랴.

    전 변호사가 그런 발언을 한 건 ‘강아지’가 미워서가 아니라, 떠오르는 최악의 욕설이 그것 밖에 없다보니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이해해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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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기사]

    김일성 父子를 '개자식'이라고 부른 偉人(위인)들
    트루먼은 '개자식들', 박정희는 '미친 개'라고 불렀다.

    趙甲濟


    필자가 김정일을 '개자식'이라고 부르니 "속이 시원하다"고 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다. 너무 심한 표현 아닌가 라고 평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개자식' 정도는 학살자 김정일에 대한 존칭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김일성(개자식의 아버지)과 김정일을 개에 비교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일으킨 김일성을 '미친 개'라고 불렀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도 김일성 집단을 '개새끼들'(sons of bitches)이라고 했다. 육군 제3사단도 김일성 父子를 '미친 개'라고 호칭한다.

    1950년 6월24일 해리 트루먼 美 대통령은 週末(주말)을 고향(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보내고 있었다. 밤 9시쯤 잠자리에 들려는 대통령을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메릴랜드에 있는 집에서 건 전화였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새끼들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일갈하였다. 그는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말렸다.
    “야간 비행이 위험하고 국민들을 놀라게 할 필요도 없으며, 이미 해야 할 조치는 취했습니다. 잠이 오면 푹 주무세요.”

    곁에 있었던 딸 마거릿의 회고에 의하면 트루먼은 전화를 받고 돌아오면서 매우 격앙되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의 序曲(서곡)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트루먼의 미군 파병(派兵) 결심으로 한국인 5,000만 명이 오늘 김정일 치하(治下)가 아니라 자유와 번영이 꽃피는 대한민국 땅에 살고 있다. 그때 트루먼은 한국에 파병(派兵)해야 할 아무런 조약상의 의무도, 전략적 이해(利害)관계도 갖고 있지 않았다. 미국의 군부는 한국은 지킬 수도, 지킬 필요도 없는 곳이라고 판단, 그 한 해 전에 주한(駐韓)미군을 철수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딘 에치슨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하여 한국이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된다는 공언(公言)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김일성과 스탈린은 남침하여도 미국의 지원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두 독재자가 오판(誤判)한 것은 트루먼의 인간됨이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농사꾼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트루먼은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었다. 악(惡)을 보면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그의 위대한 성격이 한국을 살린 것이다. 김일성-스탈린-모택동(毛澤東)이 합작하여 일으킨 전쟁에 맞서 싸운 양국(兩國)의 지도자가 공산주의를 누구보다 잘 아는 트루먼과 이승만(李承晩)이었다는 사실은 한민족(韓民族)의 행운(幸運)이었다.

    그럼에도 이 땅엔 한민족(韓民族)을 멸망에서 구해준 이 미국인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김정일과 그 졸도들로부터 당하고 있는 것이다.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 조직, 나라가 복(福)을 받은 순 없는 일 아닌가?

    왜 고마움을 모르는가? 악당들에 대한 분노의 정의감(正義感)이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 김정일을 '개자식'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국방위원장'이라 부르는 인간 사이엔 질적(質的)인 차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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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맥아더의 오판(誤判)으로 중공군의 기습을 허용한 미국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모택동(毛澤東)이 북경(北京)에서 원격조종하는 40만 대군(大軍)이 38선을 향하여 물밀 듯이 밀려내려오고 미군(美軍)은 곳곳에서 포위, 차단당하면서 패주하는 가운데 트루먼 대통령을 괴롭힌 것은 맥아더 사령관과 동맹국 영국이었다.

    맥아더는 "원폭을 쓰든지, 중공을 공격하지 않으면 한국을 지킬 수 없다. 차라리 한국을 포기, 일본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고 비명을 지르고,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은 워싱턴으로 날아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을 포기하고 미군을 철수시켜 유럽 방어에 투입하자고 압박한다.
    이 제의에 대하여 트루먼 대통령은 이렇게 거절하였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도와주면 좋습니다. 도와주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든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을 버리면 우리를 믿고 함께 용감하게 싸웠던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우리는 곤경(困境)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트루먼은 한국을 두 번 구한 것이다.

    미(美) 10군단은 동해안 청진호 부근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당하여 흥남항(港)에서 철수할 때 한국인 10만 명을 LST에 태워 남쪽으로 데리고 왔다. 허겁지겁 후퇴하는 군대가 이렇게 많은 외국인, 그것도 민간인들을 구출해준 사례는 세계전사(戰史)에서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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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제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을 읽다가 가슴을 치는 감동을 느낀 대목이 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쓴다.

    <한국전쟁의 휴전(休戰)협상 중 가장 골치 아픈 안건(案件)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우리는 미군 포로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로 걱정이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끌고 간 미군 포로들이 비(非)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증거와 보도가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적십자사(赤十字社)의 현지 시찰을 거부하더니 포로 명단을 제출하였는데, 실제 인원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1952년 1월1일, 우리는 휴전협상에서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만 교환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로써 가장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문제에선 절대로 양보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제도이고, 따라서 정신이 바로 박힌 정부라면 자유롭게 살겠다는 포로를 억지로 이런 제도 하로 돌려보낼 순 없는 것이다. 우리 편에 서서 자유를 위하여 싸운 한국인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는 전쟁 포로들을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공산당 지배 체체로 돌려보내려는 해결책을 거부하였다. 1952년 5월7일 내가 한 연설에서 내 마음 속에 있던 생각을 정확하게 담은 구절이 하나 있었다.

    “인간을,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도록 넘겨주는 대가(代價)로 휴전을 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We will not buy an armistice by turning over human beings for slaughter or slavery.)

    나는 이 건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무시한 강제송환은 한국전(韓國戰)에 참전한 우리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도덕성의 근본과 인도주의 원칙과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포로들을 강제로 돌려보내면 (그들에게)비참한 유혈(流血)사태를 불러 미국과 유엔에 있어서 영원한 불명예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포로들을 강제로 송환받기를 요구함으로써 세계 앞에 그들이 어떤 체제를 운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알지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보낸 트루먼 대통령은 임기 말에 가면 승리도 패배도 아닌 상태에서 휴전(休戰)협상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바람에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다. 역대(歷代) 최저 지지율이었다.

    보통 대통령이라면 ‘모든 포로의 상호 교환’을 통하여 자국민(自國民) 포로를 서둘러 데리고 오려 하였겠지만 트루먼은 반공(反共)포로들을 돌려보낼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固守)하였다. 반공(反共)포로들의 다수는 북한군 포로였다. 즉, 외국인의 인권(人權)을 위하여 사실은 고매한 인도적 원칙을 위하여) 자국민(포로)을 희생시킨 셈이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선 반공(反共) 포로와 공산 포로 사이에서 殺戮(살륙)이 끊이지 않았고, 미군 포로 수용소 소장을 공산 포로가 납치해가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래도 트루먼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休戰(휴전)협상이 難航(난항)하는 가운데 高地戰이 2년간 계속되어 쌍방 포로들보다 더 많은 수십 만 명이 전사상(戰死傷)하였다. 미군(美軍) 6.25 전사자의 45%가 휴전회담 기간중 죽었다. 스탈린이 죽자 공산측은 미국의 ‘자유의사 확인 후 송환’ 원칙에 동의하였다.

    1953년 6월18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할하던 북한군 출신 반공(反共)포로 약3만 명을 강제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중공군과 북한군은 항의하는 척하다가 그냥 넘어갔다. 북한정권이 한국군 포로 수만 명을 돌려보내지 않고 不法(불법) 억류한 것은 이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이란 설(說)도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6.25 전쟁중 네 번 위대한 인도적 결단을 하여 한국과 한국인을 살렸다.

    남침(南侵) 보고를 받자마자 “그 개새끼들을 막아야 한다”면서 참전을 결단하였고, 중공군이 38선 이남까지 밀려내려 오고 맥아더와 영국이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를 건의하였을 때도 “미국은 곤경(困境)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고 선언하였다. 미군은 흥남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면서도 한국인 10만 명을 구출하여 데리고 왔다. 그리고 반공포로를 보호하기 위한 결단!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는 미군이 한 사병(士兵)을 구출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보내 수십 명이 희생되는 줄거리이다. 미국이 구하려고 하였던 것은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高貴(고귀)한 인도주의 원칙이었다. 한국전에서도 트루먼 대통령은 그 원칙을 지켜내기 위하여 수많은 미군들을 희생시켰다.

    그 덕분에 한국인들은 지금 번영과 자유를 누리면서 잘 살고 있다. 그 한국인들이 트루먼을 잊었다. 트루먼이란 이름이 붙은 거리, 공원, 기념물이 없다. 임진각 공원의 한 귀퉁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그마한 트루먼 동상이 있을 뿐이다.

    트루먼 한 사람의 결단에 의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한국인은 김일성 남침(南侵) 전쟁 60주년을 맞아 ‘트루먼 대통령 기억하기 운동’이라도 벌여야겠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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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회담중 미군 전사상자(戰死傷者)가 45%!
    자유의지에 의한 포로 송환 원칙을 지키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趙甲濟


    1951년 여름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2년이 걸렸다. 휴전회담이 이렇게 길어진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및 중공군 중 상당수가 돌아가기보다는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했다. 제네바 포로 협정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인들 중 상당수가 남고 싶어했으나 미국은 이들을 무조건 돌려보냈다. 이들은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폴 니츠 등 미 국부부 간부들은 이 전례(前例)를 되풀이해선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국방부는 무조건 송환쪽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가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의 최종 결재를 받자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단했다.

    공산군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하여 휴전은 늦어졌고 트루먼 재임(在任)기간중 휴전에 이르지 못했으나 미국은 인권(人權)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미군은 한국전(韓國戰)에서 전사(戰死) 5만3,000명을 포함, 14만 명의 사상자(死傷者)를 냈다. 그 가운데 45%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입은 피해라고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 그것도 적군(敵軍)의 인권(人權)을 존중한다는 고귀한 원칙을 국가가 고수하는 데 얼마나 비싼 비용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미군은 1950년 흥남에서 철수할 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10만 명의 피난민을 군함에 태우고 남한으로 왔다. 이 또한 세계전사(戰史)에서 찾기 힘든 인류애의 발현(發顯)이었다.

    1953년 6월18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막바지에 이른 휴전회담이 깨진다고 화를 냈으나 공산군측도 내심으론 골치 아픈 문제를 그렇게 해소해버린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깨려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한미(韓美)상호방위 조약과 국군현대화 계획 및 전후(戰後) 복구지원들을 약속한다.

    이때 처음으로 이승만(李承晩)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트루먼, 스탈린, 모택동(毛澤東), 김일성(金日成), 맥아더가 주무르던 한국전쟁의 향방을 이(李) 대통령이 막판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미(韓美)동맹이란 국가번영의 울타리를 만들어낸다.

    수년 전 ‘모택동(毛澤東) 비화(秘話)’를 쓴 정창과 할리데이 두 저자(著者)는 러시아측 외교문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모택동(毛澤東)이 김일성(金日成)에게 '휴전당시 불법(不法)억류하고 있던 6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계속 잡아두도록 지시함으로써 이들을 비참한 운명에 넘겼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탈출도 할 수 없도록 북한의 벽지로 보내졌으며 생존자가 있다면 이들은 아직도 그런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모(毛)는 중공군 포로 2만1,374명중 3분의 2가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가버린 데 대한 보복을 한국군 포로에 대해서 한 셈이다. 두 저자가 인용한 문서는 러시아에서 2000년에 출판된 '극동문제연구'(Problemyi Dalnego Vostoka. 제2권)에 실린 '알레나 볼로코바(Alena Volokhova)의 '한국전의 휴전회담'(1951-1953)이란 논문이었다.

    이 모택동(毛澤東) 전기는 한국전쟁 때 전사(戰死)한 중공군은 약 40만 명이며 연 300만 명이 참전했다고 했다. 공식발표로는 전사자(戰死者)가 15만2,000명이지만 등소평(鄧小平)이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실토한 숫자가 40만이란 것이다.

    좌익들이 만든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휴전회담이 늦어진 것은 유엔군측이 무리하게 자유송환 원칙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란 투로 서술하였다. 공산군 입장에 서서 불평하는 꼴이었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좋은 사람이 나쁜 자들보다 훨씬 많은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