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 유작, 22~2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아바도 지휘, 정선영 연출…성악가 백석종·서선영·에바 프원카 등 출연
  • ▲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 기자간담회. 정선영 연출(왼쪽부터), 지휘자 로베르토 아바도, 성악가 에바 프원카·백석종·서선영·김영우.ⓒ예술의전당
    ▲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 기자간담회. 정선영 연출(왼쪽부터), 지휘자 로베르토 아바도, 성악가 에바 프원카·백석종·서선영·김영우.ⓒ예술의전당
    막이 오르면 찬란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름답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공주 투란도트가 던지는 세 개의 수수께끼는 달콤한 구혼의 제안이 아닌, 단두대로 향하는 죽음의 초대장이다. 실패한 자들의 목이 차례로 날아가고 광장이 붉은 피로 물들 때, 타국의 유랑 왕자 칼라프가 이 잔혹한 유희에 스스로 뛰어든다.

    칼라프는 보란 듯이 세 개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내지만 공주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결혼을 거부한다. 이때 칼라프는 "동이 트기 전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면 나는 기꺼이 목을 내놓겠다"는 대담한 역제안을 던진다. 그날 밤, 공주의 병사들은 왕자를 홀로 연모해 온 여종 류를 붙잡아 모질게 고문한다. 류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차가운 칼날을 자신에게 겨누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슬프고 잔인한 순간은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현실과도 닮아 있었다. 1924년 후두암과 사투를 벌이던 거장은 류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까지 오선지를 채운 후, 영원히 펜을 내려놓았다.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 한 번에 사랑에 눈뜨고 제국이 환희를 노래하는 결말은 사실 푸치니의 것이 아니다. 그의 제자 프랑코 알파노가 스승의 미완성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한 해피엔딩이다.

    실제로 이 결말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객과 예술가들에게 가슴 깊은 의문을 남겼다. 잔혹한 살육을 일삼던 공주가 자신 때문에 무고한 여종이 죽었는데도 고작 왕자의 강제적인 입맞춤에 하룻밤 사이 온순한 연인으로 변한다는 설정은 현대의 관객들에게 기괴함마저 선사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수많은 연출가는 원작의 억지스러운 엔딩을 거부해 오기도 했다. 어떤 무대에서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투란도트가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어떤 무대에서는 냉혹함을 버리지 못한 공주가 칼라프를 참수하거나 체포해 감옥에 처넣는 엔딩을 시도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의 유작이자 올해 초연 100주년을 맞는 오페라 '투란도트'가 오는 22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작품은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냉혹한 공주 투란도트가 던진 세 가지 수수께끼를 맞히려는 망국의 왕자 칼라프의 도전을 그린다.
  • ▲ 소프라노 서선영.ⓒ예술의전당
    ▲ 소프라노 서선영.ⓒ예술의전당
    이번 프로덕션을 이끄는 정선영 연출가는 '투란도트'를 '푸치니발 전쟁 종식 프로젝트'로 새롭게 정의하며 고전의 심층적 메시지를 길어 올렸다. 정 연출가는 "겉으로는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로 보이지만, 내면에는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전쟁의 사슬을 끊어내고 평화를 갈망하는 인류의 기원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류 역으로 활약하다 처음 투란도트 역을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은 "전에는 투란도트를 보며 '왜 저렇게 소리만 지르고 차갑게 굴까' 하고 이해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번 공연을 앞두고 배역을 연구하면서 그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극 중 투란도트의 선조는 낯선 남자들에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서선영은 이 비극에 주목하며 "어린 공주에게 투란도트의 냉혹함은 단순한 잔인함이 아니라 평생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와 두려움이 만들어낸 '처절한 자기방어 기제'였다는 사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즉, 사랑을 거부하는 차가운 지배자가 아니라, 과거의 폭력이 남긴 상처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날을 세워야만 했던 '상처 입은 인간'으로 다가왔다"고 덧붙였다.

    음악적 완성도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제7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로베르토 아바도가 책임진다. 1984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연 이후 오랜만에 '투란도트' 지휘봉을 잡은 아바도는 "푸치니의 음악은 정통 유럽 어법 속에 8개의 중국 전통 선율을 녹여낸, 시대를 앞서간 모던한 음악"이라고 평했다.

    그는 푸치니의 급작스러운 타계로 미완으로 남겨진 결말부(프랑코 알파노 완성본)에 대해 "푸치니가 살아있었다면 말러 교향곡처럼 피아니시모로 사라지는 여운을 남겼을 것 같지만, 알파노의 전통적 피날레 역시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이라며 "정통 푸치니 사운드의 정수를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 ▲ 테너 백석종과 소프라노 에바 프원카.ⓒ예술의전당
    ▲ 테너 백석종과 소프라노 에바 프원카.ⓒ예술의전당
    공연의 관전 포인트는 세계 클래식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테너 백석종의 한국 오페라 무대 전막 데뷔다.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한 후 빈체로 콩쿠르 등에서 우승하며 드라마틱 테너로 우뚝 선 그는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세계 최고 극장을 누비며 기량을 뽐내왔다.

    백석종은 칼라프를 자신의 시그니처 롤(Signature Roll)이라 소개하며 "높은 음역과 극적 표현이 필요한 까다로운 배역이지만 내 목소리와 잘 맞고, 승리와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캐릭터가 내 성품과도 닮았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세계 많은 특별한 무대에 섰지만 사랑하는 조국, 부모님과 고국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이번 무대가 가장 특별하다"며 대표 아리아 '네순 도르마(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를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서선영과 함께 투란도트를 연기하는 소프라노 에바 프원카는 작품을 공주가 아닌 왕자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칼라프의 모습 때문에 작품의 제목을 '칼라프의 여정'이라 바꿔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의 죽음이든 사회적 몰락이든, 우리 역시 저마다의 죽음을 피해 도망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칼라프의 신발'을 신고 걷는 셈이다."

    프원카는 투란도트를 그저 남자를 잡아먹는 차가운 공주로만 해석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투란도트는 1차원적인 인물이 아니라 여러 겹의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캐릭터"라며 "단순히 강하고 잔인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숨겨진 어둠과 밝음, 강함과 약함을 관객들에게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B팀 공연에 칼라프 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테너 김영우는 그간 '투란도트'에만 약 70차례 출연했다. 이 중 50여 회는 독일 극장에서 조연인 '핑·팡·퐁' 역을 소화했다. 그는 "조연으로 무대에 서면서도 언젠가 칼라프를 노래하는 순간을 늘 꿈꿔왔다"면서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공연을 준비해 김영우만의 찬란한 칼라프를 선보이겠다"고 포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