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대한민국은 1919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상관 없는 별개 실체상해 임정은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일뿐···국제조약으로 인정 안돼1919 건국론, 1948 대한민국 부정하고 싶은 진보좌파세력의 역사변조 작업
  • 이종찬 광복회 회장. ⓒ뉴데일리
    ▲ 이종찬 광복회 회장. ⓒ뉴데일리

    [대한민국 1919년 建國論]을 주장하는 ‘李鍾贊 광복회’의 동키호테 노름


    대한민국은 동키호테의 나라인가.
    대한민국에 또 하나의 새로운 동키호테가 탄생하고 있다.
    ‘광복회 회장 이종찬(李鍾贊)’이라는 이름의 동키호테다.
    광복회’라는 비루먹은 말을 타고 등장한 ‘이종찬’이라는 대한민국판 동키호테가
    [대한민국 1919년 건국론]이라는 부러진 창을 들고
    75년의 대한민국 역사를 왜곡·변조하겠다는
    2023년판 “풍차 허물기” 전쟁을 선포하고 나서고 있다. 

    이 동키호테가 22일 자신이 ‘제23대 광복회 회장’에 취임하는 것을 계기로,
    광복회의 모든 공식 문서에서는
    ‘서기(西紀) 연호’ 대신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공표했다.
    그 ‘대한민국 연호’는 1919년을 ‘원년(元年)’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2023년인 금년은 ‘대한민국 105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동키호테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동키호테인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무슨 미친 짓인가?
    이 동키호테의 ‘광복회’가,
    2023년을 ‘대한민국 105년’이라고 표기한 문서를 들고 다닌다고 한 들
    과연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가
    이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미친 수작을 상대해 준다는 것인가. 

    ■ 그들은 왜 역사를 왜곡·날조할까?

    도대체 [1919년 대한민국 건국론]은 그 자체가 사실적ㆍ객관적 근거가 없는 허구다.
    역사의 왜곡과 날조에 바탕을 둔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일 먼저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1919년 4월 3일 샹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8월 15일 서울에서 수립된 ‘대한민국’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실체라는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의 수립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뿌리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의하여 강제 합병된 뒤,
    국내외에서 끊임없는 항일 독립투쟁이 전개되어 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 1919년의 3.1 독립만세운동과
    △ 1919년 4월 23일 상해에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만주에서
    △ 홍범도(洪範圖)의 봉오동 전투(1920)
    △ 김좌진(金佐鎭)의 청산리 전투(1920)가 있었고,
    국내외에서는
    △ 강우규(姜宇奎·서울·일본 총독 薺藤實 저격 시도·1919)
    △ 이봉창(李奉昌·東京·일본 천황 마차 폭탄 투척·1932)
    △ 윤봉길(尹奉吉·上海·일본 天章節 기념식장 폭파·1932) 등의 의거와
    미국에서의
    △ 이승만(李承晩)의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활동이 있었으며,
    만주에서는
    △ 김일성(金日成) 등 중국 공산당에 편승한 항일(抗日) 빨찌산 활동 등이 잇달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활동은 모두가 세력이 미미하여
    한반도의 ‘해방’ 및 ‘독립’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의 ‘해방’과 ‘독립’은
    ‘자력(自力)’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 해방과 독립, 자력에 의한 것 아냐

    1945년 8월 15일에 이루어진 한반도의 ‘해방’은
    한민족의 ‘독립운동’과는 상관없이
    일본제국을 패망시킨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戰勝國)들의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전후처리 차원에서 최초로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것은
    1943년 11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열린
    미·영·중 3국의 정상회담에서였다.

    이 회담에 참석한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미국 대통령과 처칠(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 및 쟝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이,
    “한국민들의 노예 상태를 고려하여 전쟁이 종결되면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 of time)에 그들을 독립시키기로 한다”고 합의한 것이다.

    이 합의는 그 뒤에 있었던
    △ 테헤란 회담’(1943년 11월) △얄타 회담’(1945년 2월) 및 △ 포츠담 회담’(1945년 7∼8월) 등
    미·영·소 3국 간의 일련의 정상회담에서 거듭 재확인되었지만,
    한반도의 ‘독립’을 어떻게 이룩할 것이냐는 데 관해서는 아무런 구체적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맞이했으며,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는
    미·소 양국 간의 합의에 따라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진주한
    미·소 양국군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전승국들의 최종적 합의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상회담의 몫이 된 끝에
    “한국인들의 준비 부족”을 이유로
    “즉각 독립”이 아닌 “5개년 신탁통치”와 함께
    신탁통치 기간 중 “자치 능력 함양”을 전담할 “과도정부 구성”을
    <미·소공동위원회>에 위임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1946년과 1947년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문제의 ‘과도정부’ 구성에 실패한 채로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Problem of Independence of Korea)를
    1947년 가을 유엔총회 의제로 상정함으로써
    한국 독립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의 차원을 떠나
    유엔의 결정 사항으로 변질되었다.    

    유엔은,
    1947년 11월 14일 채택한 총회결의 112-II호를 통해
    한반도에 “유엔 감시하에 실시되는 인구비례에 입각한 자유 총선거를 통하여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기로 하고
    선거 감시와 관리를 위하여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그러나, 유엔총회결의 112-II호의 수용을 거부한 소련측의 불허로
    UNTCOK이 북한 지역 진입에 실패하자
    유엔은,
    1948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우선 유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의 지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고
    그 결과 같은 해 8월 15일 서울에서
    “대한민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에서는
    같은 해 9월 9일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과는 별개의 ‘국가’ 수립을 선포하는 맞불을 놓았다. 

    ■ 한반도 2개 국가 출현···UN의 정통성 판단은?

    결국 한반도에는 2개의 ‘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당연히 어느 쪽이 정통성을 구비했는지를 판별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판별하는 역할은,
    당연히 한국 독립의 산파역(産婆役)을 맡았던 유엔의 몫이 되었다.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자로 채택한
    이 역시 “한국의 독립”(Problem of Independence of Korea)라는 제목의 총회결의 195-III호를 통하여 이 역할을 수행했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국가”라고 판정한 것이다.    

    유엔총회 결의 195-III호는 1항에서
    “전체 한반도의 대다수 인구가 거주하고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감시와 자문이 가능했던 지역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력과 관할권을 행사하는 합법정부(‘대한민국’)가 수립되었다”면서
    이 ‘정부’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감시 아래 표출된 그 지역 유권자들의 자유의사에 입각한 정부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고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에게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다음은 유엔총회 결의 195-III호 제1항의 영어 원문 :

    Declares that there has been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 that this Government is based on elevations which were a called expression of the free will of the electorate of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

    ■ 대한민국은 상해임정과는 무관

    이 같은 역사의 흐름은
    1948년 8월 15일자 대한민국의 ‘독립’이
    한국인 독립 선열(先烈)들에 의하여 산만하게 전개된 독립운동은 물론
    1919년 4월 23일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무관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3년에 체결된 <몬테비데오 조약>에 의거한
    국가 성립의 기본 요소들인
    ① 국토와 ② 국민 및 ③ 주권과 ④ 국제적 인정을 구비하지 못한
    ‘독립운동단체’에 불과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자 ‘독립’을 통하여 비로소
    ① 국토와 ② 국민 및 ③ 주권과 ④ 국제적 인정을 구비한
    ‘독립국가’가 된 것이었다. 

    유엔총회 결의 195-III호가
    ‘대한민국 정부’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여기서의 ‘정부’는 ‘국가’와 동의어(同義語)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이 ‘국가’로서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지,
    ‘정부’로서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결국,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독립’을 확보하여 비로소 ‘독립국가’가 되었다.
    1948년 8월 15일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독립기념일’이자 ‘건국기념일’인 것이다.   

    ■ 자력 해방 못했어도 대한민국은 세계사적 성공 사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감내해야 했던 한국인의 정서(情緖)에는
    이에 대한 죄책감(罪責感) 때문에
    독립 선열들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독립’ 사이에
    무언가 연계(連繫)를 설정하는 것을 거부하기 어려운 정서가 뿌리내리는
    특이한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같은 심리상태가
    1948년 헌법제정 과정에서
    당시의 건국 주역들로 하여금
    신생 독립국의 국호로 ‘대한민국’을 선택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사이에
    명칭 상으로 연계가 성립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1948년 헌법 제정에 참가했던 건국 주역들은
    이 양자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놀라울 정도의 냉정을 유지했음을
    최초 헌법의 전문(前文)이 보여주고 있다. 

    1948년 7월 17일자로 공포된 최초 헌법은 전문에서
    ‘상해 임시정부’를 직접 언급함이 없이
    “기미(己未)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기술하는 데 그쳤다. 

    ‘계승’의 대상을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으로 특정하고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대한민국이 “새로이 건설되는 국가”임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건국 이후 70년의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대한민국을 할퀴고 지나간 수많은 정치파동의 격랑들은
    대한민국 독립의 성격에 관한 헌법 전문의 표현에도
    그 상흔(傷痕)을 남겨 놓았다.
    대한민국이 그동안 아홉 차례에 걸쳐 헌법에 손질을 하는 동안,
    1980년10월의 제8차 개헌 때까지
    전문에 기술된 ‘계승’의 대상은
    일관되게 “3.1운동의 위대한 독립정신”이었다. 

    ■ 1948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세력들

    그러나, 이 표현이 1987년 12월의 제9차 개헌 때
    이른바 ‘진보 좌파’ 세력의 요구가 수용되어 크게 손질되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로 바뀐 것이다. 

    그 이후 이 나라의 ‘진보 좌파’ 세력은
    헌법 전문의 이 표현을
    대한민국의 [1948년 독립론]을 부정하고
    [1919년 독립론]을 옹호하는
    이론적 근거로 적극 활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여,
    앞에서 상세히 살펴 본 것처럼,
    이들 ‘진보 좌파’의 이 같은 주장은 허구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독립운동 선열들에게는 송구한 일이지만,
    이들의 독립운동과는 상관없이
    1948년 유엔을 산모(産母)로 하여 새로이 이루어진 것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독립운동 선열들에 대한 송구스러움 때문에
    그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지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불과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가’로 의제(擬制)하여
    이를 대한민국이 계승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의 억지일 뿐이다.    

    ‘이종찬 광복회’의 동키호테 노름이
    가뜩이나 계속되는 좌우 이념 갈등으로
    몸살이 계속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풍토에서
    또 어떤 모래바람을 불러 일으킬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윤석열(尹錫悅) 정부가
    올바른 현대사로 자라나는 청소년을 올바르게 교육하고
    국민들이 사문난적(斯文亂賊)들의 사설(邪說)에 현혹되지 않도록
    올바른 공론의 장을 만들어내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