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미국과 틀어진 사우디 끌어 들여 제재포위망 약화 시도사우디, 이란 이용해 미국 압박 견제중공, 이란·사우디 조정·중재 형식 빌미로 중동정치 진입
  • ▲ 중공이 이란과 사우디를 중국으로 불러 화해를 중재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가운데는 왕이 중국공산당 정치국원.ⓒ연합뉴스
    ▲ 중공이 이란과 사우디를 중국으로 불러 화해를 중재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가운데는 왕이 중국공산당 정치국원.ⓒ연합뉴스
    2023년 3월 10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중국의 중재로 베이징에서 양국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중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다퉈왔던 두 강국의 화해는 중동 국가들은 물론 세계가 환영할 일이다.

    그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각각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이 지역에서 패권을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양국은 이슬람 종파간의 갈등 외에 종족,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정치와 외교 측면에서도 다른 노선을 걸어왔다. 전통적으로 친미노선을 지켜온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 미국과 다소 소원해진 상황에서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화해를 한 것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이란과 아랍권간의 문화적 차이 

    이란은 이슬람 문화권이지만 아랍권 국가들과는 다른 문명권 국가이다. 이란은 인종, 언어, 문화, 산업 모두가 아랍권과 다르다. 이란은 아리아인 계통의 농경민족이고 아랍인은 셈족 계통의 인종으로 전통적으로 유목민족이다. 이란의 공용어는 인도이란어파에 속하는 페르시아어(Farsi)인 반면 아랍어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셈어파 계통이다.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찬란한 역사에 뿌리를 둔 나라이다. 전성기의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터키와 그리스, 동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쪽으로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었다. 이란 국민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인의 민족적, 문화적 우월감으로 강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이란은 약 8700만 명 인구의 반 이상이 아리아인 혈통의 페르시아인이고, 그 외에 아제르바이잔족, 쿠르드족, 투르크멘족, 아랍족 등이 어울려 사는 다민족국가이다. 전체인구의 약 94%가 이슬람 시아파이고 약 4%가 이슬람 수니파이다. 이란의 종교와 문자는 이슬람 문화권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를 종주국으로 하는 수니파 국가들과는 대립해왔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 탄생과 아랍권 

    현재의 ‘이란’은 1936년 팔레비 왕조 때 ‘이란제국’이란 국호를 사용한 후, 1979년 탄생한 신정국가(神政國家) ‘이란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을 말한다. 1979년 1월 팔레비 국왕이 이집트로 망명하자 1964년에 추방되었던 시아파 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귀국하여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같은 해 4월 1일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하고 스스로 대통령보다 상위의 종신 정치·종교 지도자가 되어 이란을 통치했다. 

    호메이니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으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고, 팔레비 시절 복장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여성에게 전신을 가리는 차도르(chador) 착용을 강요했다. 또한 강력한 시아파 근본주의로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국가들과의 적대관계를 심화시켰다. 호메이니는 또한 팔레비 왕조의 친미, 친서방 노선을 뒤집고 미국 및 서방국가들과 등지며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이는 미·소 냉전기에 지정학적 요충지인 이란을 적극 지원했던 미국의 중동정책의 근간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결국 호메이니 등극 이듬해인 1980년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수니파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했다. 이 전쟁은 결국 두 나라 경제를 파탄에 빠뜨린 채 교착 상태로 끝났다.

    1908년 중동지역 최초로 석유를 발견한 이란은 석유매장량 세계 5위로 전세계 석유매장량의 약 9%를 차지하며, 천연가스매장량도 세계 매장량의 약 1/7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이란은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과 2018년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재 조치’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아라비아의 현대사는 18세기 중반 이슬람원리주의 운동(‘와하비즘’)의 확산으로 시작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건국 이전의 사우드 왕조는 1915년 이후 영국의 보호령이 된 후 1927년 ‘헤자즈’와 ‘나지드’ 왕국으로 독립하였다가,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46년 왕위에 오른 파이살(Faisal bin Abdulaziz Al Saud) 국왕이 와하브 교단에 많은 권한을 부여하면서 ‘와하비즘’이 점차 극단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2022년말 기준 총인구는 약 3600만 명이고 아랍민족이 인구의 90%를 차지하지만 외국인 비율이 약 33%에 달한다. 전체인구의 약 90%가 이슬람 수니파이며 약 10%가 시아파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노동인구는 1100만 명 수준으로 파악되지만 그 중 80%가 외국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직장인 대부분은 정부의 공무원들이다. 

    1938년에 석유를 발견한 사우디아라비아는 2021년말 기준 석유생산량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세계 총생산량의 약 1/12을 차지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며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1981년에 설립된 페르시아만 연안 6개국(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UAE, 카타르, 오만, 바레인)의 지역 경제·안보 협력체인 걸프아랍국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GCC)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숙명적 대립 관계 

    이란은 팔레비 왕조 시절인 192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신인 ‘네지드-헤자즈’ 왕국과 수교했다. 이후 1960년대부터 파이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이란 방문으로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1968년 사우디아라비아-이란간 경계협정이 맺어져 페르시아만(灣)의 영토가 확정된 후 1970년대 중후반까지 양국은 우방국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양국은 각각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주국으로서 지역 패권을 놓고 계속 대립해왔다. 이슬람의 발상지로 성지(聖地)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의 '지도자 국가'를 자처하며 강력한 왕정(王政)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이란은 호메이니에 의한 신정(神政)체제 통치를 하면서 이를 다른 이슬람국가들에 전파하려 하고 있어 양국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냉전 시기 미국은 소련의 중동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을 친미국가로 육성하면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이란이 1979년 ‘이란 혁명’으로 반미국가가 되자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을 통해 이란을 견제하려 했다. 이런 미국의 정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란은 이에 맞서 러시아, 중국과 경제적, 군사적 교류를 강화했다. 

    2003년 미국 주도로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제거되고 이라크에 시아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결과적으로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간 완충 역할을 하던 수니파 이라크 정부가 사라지면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위협적인 이란의 존재 

    사우디아라비아에게는 2.5배의 인구에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이란이 위협적인 존재이다. 또한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 못지않게 석유와 천연가스 등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탄탄한 제조업 기반까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무엇보다 우려하는 건 이웃 이란의 신정(神政)체제이다. 1979년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붕괴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1987년에는 메카에 성지순례 온 이란인들의 반미, 반이스라엘 시위를 사우디 군대가 진압하는 과정에 400여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메카 사건’). 당시 이란에서는 분노한 시위대가 이란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과 쿠웨이트 대사관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2010년대에 들어 사우디아라비아가 대이란 경제제재에 동참하고 예멘 내전에서 수니파 친정부군을 지원한 반면 이란은 ‘후티(Houthi) 반군’(시아파 무장단체)을 지원하면서 양국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시리아 내전에서도 수니파 무장반군을 지원했지만, 이란이 지원한 시아파 계열의 알 아사드 정부군에 밀렸다.

    일부 부족들과 현대교육을 받은 지식층에 절대권력의 왕정에 반발하는 세력이 늘어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 산유국들은 이란의 신정체제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사드 정권, 레바논 '헤즈볼라' 등을 연결하는 시아파 연합(‘Shia Crescent’)은 수니파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에게는 매우 부담되는 세력이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단교 

    2016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아파 종교지도자 셰이크 님르 알님르(Sheikh Nimr al-Nimr)를 반정부 시위 및 테러 주도 혐의로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처형했다. 그는 이란 유학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귀국하여 시아파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주(Eastern Province)의 독립과 이란식 신정체제를 주장한 인물이다. 이 사건은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단교로 이어졌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7년 UAE, 이집트, 바레인, 요르단 등과 함께 카타르와도 단교를 선언했다. 카타르가 이란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이슬람 테러조직을 지원한다는 이유였다. 그 후 2020년 바레인과 UAE는 미국의 중재로 ‘아브라함 협정’ 체결로 이스라엘과 수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21년 1월 5일 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의에서 카타르와의 단교를 끝내는 협정에 서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전격적 화해 

    중국 시진핑 주석은 작년 12월 리야드 방문 당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만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간의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시진핑 주석은 금년 2월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중국 방문 당시 이란과의 관계 강화 및 이란 핵합의 재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그 후 지난 3월 10일 중국의 중재로 베이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양국의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양국의 합의는 지난 7년간 단절됐던 외교관계의 2개월내 재개, 상호 대사관 설치, 상호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이 핵심이다. 이번 합의로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협하는 예멘 ‘후티 반군’이나 ‘헤즈볼라’ 등 중동 내 친이란 세력의 도발을 억제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에 경제 지원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양국의 화해로 중국은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경제적 실리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중동석유 의존도가 높은 중국이 양국의 지원으로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을 이용하는 에너지 안보의 안정성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 미국은 전통적 친미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지역에서 중국으로 인한 리더십 손상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이란 화해 그 이후 

    양국의 화해를 중재한 중국이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 무역대금 결제용으로 위안화(貨) 대출을 제공했다. 구체적 대출 규모는 미지수이나 이번 위안화 대출은 시진핑 주석의 작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시 체결한 ‘전면적 전략동반자관계 협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속셈은 1974년 석유파동 이후 미국 달러화로 원유대금을 결제하는 세계적 관행에 제동을 걸 의도로 해석된다.

    한편, 작년 미국의 석유 증산 요구를 거절한 후 중국 중재로 이란과 화해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새 국적항공사 설립을 위한 약 350억달러(약 46조원) 규모의 항공기를 미국 보잉사로부터 구매할 것이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을 의식해 미국과의 관계를 등한시 할 수는 없다.

    세계 원유의 반 이상이 왕래하는 페르시아만에는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이라크, 이란 등 7개국이 해안에 접해 있다. 유럽에서 지중해를 거쳐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최단항로인 수에즈 운하와 홍해와 함께 페르시아만은 미국과 자유진영이 반드시 사수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이다. 

    국가안보와 국익을 우선으로 하는 외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배후에서 미국과 중국이 최근에 엮어낸 이 지역 역사의 흐름에서 살펴보듯이, 세계의 정세는 각국의 역사적 갈등관계보다 현실적 이해관계를 좆아 흘러간다. 최근 한·일간의 화해와 협력의 움직임이 국내외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한일간의 외교도 우리의 아픈 역사나 반일 정서에서 벗어나 국가안보나 경제문제 등 현실적 필요에 비중을 두고 그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한일관계 해법에 대해 전세계가 환영과 기대의 뜻을 표명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제1야당 대표가 ‘망국적 야합’ ‘조공(朝貢)’ ‘일본의 하수인’ ‘영업사원이 나라를 판 것’이라는 등의 도를 넘는 막말로 민심을 선동하고 있다. 야당으로서의 합리적 이견(異見)이 아니라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국가대사(國家大事)를 폄훼(貶毁), 훼방할 목적으로 국민의 반일정서를 자극하는 꼴사나운 모습이다. 

    북한이 현재 진행중인 한·미연합연습 ‘자유의 방패(FS)’에 대응해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고 “(핵을)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정세에 발맞춰 국가안보와 국익을 지키고 키워나가는 것이 진정한 외교이고 애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