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한 달 시간낭비 청와대·여당, 정쟁 직면해도 유구무언이다
  • ▲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지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제천 화재참사 합동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홍준표 대표는
    ▲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지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제천 화재참사 합동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홍준표 대표는 "세월호정권처럼 참사를 정쟁에 이용하지 않겠다"며, 대신 연말연시를 맞아 일제히 소방점검을 할 것을 촉구했었다. ⓒ뉴시스 사진DB

    충북 제천 화재참사 현장을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찾은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인데 출장을 떠났기에 날짜도, 시간도, 발언 내용도 기억에 뚜렷하다.

    합동분향소와 화재참사 현장을 돌아보며, 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내가 경남지사할 때에는 연말연시에 소방점검을 철저히 해서, 4년 4개월 동안 경남에서 불이 나 사람 죽은 일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다소 민망한 자기자랑이 있은 뒤에, 홍준표 대표는 취재진과 만나 "(제천 화재참사를) 세월호정권처럼 정쟁에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대신 "연말이 되면 전국에 소방점검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홍준표 대표는 "이 정부는 출발하면서 재난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대한민국에는 연말연시에 언제나 화재참사가 나기 때문에, 일제히 소방점검을 해서 참사를 예방하는 것은 기본적인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자화자찬(自畫自讚)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금기이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흔히 통용된다. 또, 정책적 제안을 하려는데 무게를 싣기 위해서라면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다.

    '내가 도지사할 때 4년 4개월 동안 그렇게 해봤더니 민생에 유익한 효과가 있더라. 한 번 해보라'라는 차원이라면 자신의 치적을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는 것도 괜찮다.

    흔히 '발목잡는 야당' '반대만 하는 야당' '입만 열면 사퇴하라는 야당'이 아닌,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견제할 것은 견제하되, 건전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야당을 보고 싶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정쟁에 이용하지 않겠다"며 "대신 연말연시에는 화재참사가 잦으니 일제히 소방점검을 하라"는 제1야당 대표의 언사는 모범사례였던 셈이다. 게다가 자신의 행정 경험까지 녹아 있는 제안이니 매우 건설적인 대안 제시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제안은 집권세력에게 묵살됐다.

    참사가 일어난 밀양 세종병원은 전기설비가 많고, 1층 응급실에 불이 나면 중앙계단이 연통처럼 구조로 연기를 확산해 애초부터 화재에 취약한 구조였다.

    그럼에도 스프링쿨러 설치가 올해 6월까지 유예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소방점검 때 스프링쿨러가 설치될 때까지 다른 대책을 마련하는 게 당연했다. 그게 이뤄지지 않았다면 점검은 형식적이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이러한 전국 일제 소방점검을 연말연시를 맞아 진두지휘해야 했던 것은 "안전의 컨트롤타워"를 자임하는 청와대였을 것이다. 또 "당정청은 일체"를 입만 열면 강조하는 집권여당도 책임을 나눠진다.

    그 집권여당 원내지도부와 문재인 대통령이 마주앉은 불과 사흘 전의 청와대 오찬회동에서는 무슨 말이 오갔던가.

    이번에 화재참사가 난 경남이 언급됐지만, 국민안전 차원에서의 논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로지 다가오는 6·13 지방선거에서의 '땅따먹기' 대상일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경남 동부의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자, 민주당의 한 의원이 "서부도 곧 좋아질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눈에 밀양은 거기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안전을 살펴야 하는 지역이 아닌, '선거 분위기'가 좋아진 곳에 불과했던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이 건설적 대안을 제시했는데도 집권세력이 듣지 않아 고귀한 국민의 인명이 망실됐다면, 그러한 집권세력은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거대한 힘에는 거대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제왕적 대통령 권력을 손에 넣은 자는 참사에 대해서도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제천 화재참사 직후에는 "정쟁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공언이 있었다. 대통령의 대국민사과 요구도, 내각총사퇴 요구도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날 즈음 해서 다시 밀양에서 화재참사가 터졌다. 그 사이에 대통령의 생일이 있었던 것과 청와대에서 집권여당 원내지도부와 선거 논의를 했던 오찬이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나지만, 참사예방과 국민안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같은 참사가 반복된 이상 이제는 정쟁(政爭) 요구에 직면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첫 번째 참사 때 야당이 제시했던 대안을 경시한 집권세력이 다시 참사를 빚은 이상, 국민들은 이제 청와대·여당이 어떻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지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