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자살 노무현에 일침… "과례도 비례, 국민장 두고두고 혼란 야기할 것"
  • ▲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가 지난해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가 지난해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반공(反共)·반탁(反託)·대한민국 건국 이념에 투철했으면서도 군사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소리높여 외친 민주야당(民主野黨)의 적통(嫡統), 소석(素石)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가 27일 새벽 3시 향년 94세로 타계했다.

    ◆한민당 학생조직 맡아 반공·반탁운동 주도

    1922년 경성부(京城府)에서 태어나 전주부(全州府)에서 자라난 이철승 전 총재는 전주고등보통학교(전주고의 전신)를 나와 보성전문학교(고려대의 전신)에 재학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중부(仲父)인 우농(愚農) 이석주의 소개로 고하 송진우·인촌 김성수 선생 등과 만나게 된 이철승 전 총재는 곧 한민당 학생조직을 맡게 됐다.

    그 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 통치 방침이 정해지자, 이철승 전 총재는 전국반탁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을 맡아 해방 정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우익 진영이 분열되자, 이철승 전 총재는 한민당 신파(新派)와 정치적 행동을 같이 하게 됐다. 반탁 운동을 할 때는 긴밀한 관계였던 백범 김구와는 남북협상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이견을 보이며 결별했으며, 이승만 박사와는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 박사, 서울시경청장이었던 창랑 장택상이 이끌던 경찰 조직의 건국 정부 인수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으며 갈라섰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인촌 김성수 및 장면 박사와 행동을 함께 하게 된 이철승 전 총재는 5·10 총선거에서 불과 26세의 나이로 전주부 제1선거구에 출마했으며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다만 이 때, 그의 중부 우농 이석주는 인근 완주군 제2선거구에서 당선, 제헌 국회의원이 되면서 이철승 전 총재의 정치 활동을 계속해서 후원하게 된다.

  • ▲ 지난해 67주년 제헌절 경축식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으로부터 감사패를 전달받고 있는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뉴시스 사진DB
    ▲ 지난해 67주년 제헌절 경축식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으로부터 감사패를 전달받고 있는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뉴시스 사진DB

    ◆6·25 때 학도의용군 이끌던 중 국민방위군 사건 폭로

    6·25 전쟁 중 학도의용군을 이끌고 있던 이철승 전 총재는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을 폭로해 유명세를 더했으며, 이는 전시내각에 참여해 있던 부통령 인촌 김성수의 사퇴로 이어졌다. 휴전된 뒤 1954년에 실시된 3대 총선에서 마침내 전주에서 당선, 국회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다.

    이듬해 정치적 후원자인 인촌이 서거하자, 장면 박사를 따라 민주당 신파에서 정치활동을 했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전주을(乙)에 출마해 재선 의원이 됐으며, 재임 중 4·19를 맞이했다. 이후 치러진 5대 총선에서 3선 의원이 됐고, 총선의 결과 장면 내각이 출범하면서 민주당 신파가 집권당이 되자 집권여당 소장파의 리더로 잠시 활동했으나 곧 1961년 5·16 군사혁명을 맞았다.

    정치활동정화법의 대상자로 지정돼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이철승 전 총재는 미국으로 망명, 이 기간 중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3선 개헌을 전후한 정국에 귀국, 원외(院外)에서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신민당 40대 기수론 제기되자 YS·DJ와 대권 후보 경쟁

    1971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신민당에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제기되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1966년 장면 박사가 서거한 이후로는 뚜렷한 정치적 후원자가 없었고, 망명 기간 국내 정치 활동을 오래 쉬었기에 세(勢) 부족은 뚜렷했다.

    신민당의 배후 실력자였던 유진산 당수는 이철승 전 총재의 경선 포기를 권유했고, 그는 이에 반발했으나 결국에는 따라야만 했다. 하지만 이철승 전 총재의 경선 포기에 따른 후유증과 내분으로, 유진산 당수의 뜻과는 달리 경선에서는 결국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선 다음 달에 치러진 8대 총선에서 전주 선거구에서 당선, 4선 의원이 되면서 오랜만에 원내 활동을 재개하게 됐으나, 국회는 이듬해인 1972년 10월 유신으로 해산됐다. 1973년 유신헌법에 따라 다시 치러진 9대 총선에서 전주·완주 선거구에서 다시 당선돼 5선 의원이 됐다.

  • ▲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와 환담하고 있는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이철승 전 총재는 미국 망명 시절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평소 외교·안보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뉴시스 사진DB
    ▲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와 환담하고 있는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이철승 전 총재는 미국 망명 시절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평소 외교·안보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뉴시스 사진DB

    ◆월남 패망 지켜보며 "외교·안보에는 여야가 없다" 확신

    1975년 4월, 자유 베트남이 패망하자 이철승 전 총재는 남북 대치 상황에서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따라서 국내 정치에서는 서로 경쟁하되 외교·안보에서는 초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철승 전 총재는 이것이 안보를 빌미로 야당을 견제하는 집권여당의 논리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이러한 주장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호감을 갖게 됐다. 본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에서 자신과 맞붙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호감을 갖고, 1975년 열렸던 여야 영수회담에서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도 언젠가 대통령이 돼보면 알겠지만…"이라는 파격적인 언사까지 했으나, 이 때를 기점으로 국정의 파트너를 김영삼 전 대통령에서 이철승 전 총재로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의중을 읽은 중앙정보부는 1976년 신민당 총재 경선에 적극 개입했으며, 이 결과로 김영삼 전 대통령 대신 이철승 전 총재가 신민당 총재가 됐다. 당권을 잃게 되자 격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극렬한 반(反)유신 투쟁 노선으로 선회했고, 이것이 '뉴욕타임즈 유신 비판 인터뷰 사건'~'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부마 항쟁'으로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면서 결국 1979년 10월 26일의 궁정동 안가 사건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철승 전 총재는 신민당 총재 시절 치러진 1978년 10대 총선에서 전주·완주 선거구에서 당선, 6선 의원이 됐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시사하자 "외교·안보는 초당적 협력"이라는 소신대로 미국에 건너가, 미국 망명 시절의 각종 정치적 연줄을 동원해 주한미군 철수 반대 운동을 펼쳤다. 한국 야당 지도자의 적극적인 주한미군 철수 운동은 미국 정치권에 영향을 끼쳐, 결국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철회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더민주 김종인 참여 국보위에 의해 정치활동 금지당해

    1980년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위헌 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정치풍토쇄신에관한특별조치법이 입법되자, 그 대상자로 묶여 정치 활동을 재차 금지당해 11대 총선에는 입후보하지 못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던 이철승 전 총재는 1985년 재건된 신민당(신한민주당) 소속으로 12대 총선에 전주·완주에서 당선돼 마침내 7선 고지에 올랐다. 이해 말 신민당 이민우 총재가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민주화를 달성한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자, 오로지 대권욕밖에 없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격하게 반발했으나 이철승 전 총재는 이민우 총재의 노선을 지지했다.

    이는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의 연쇄 분당 사태를 촉발했으며,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전주을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평민당에서 공천한 손주항 후보에게 참패(손주항 77.5 이철승 9.7)했다. 직후 이철승 전 총재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 ▲ 올해 초 열렸던 헌정회 신년하례회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 더불어민주당 이석현 국회부의장 등과 함께 건배하고 있는 이철승 전 총재의 모습. ⓒ뉴시스 사진DB
    ▲ 올해 초 열렸던 헌정회 신년하례회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 더불어민주당 이석현 국회부의장 등과 함께 건배하고 있는 이철승 전 총재의 모습. ⓒ뉴시스 사진DB

    ◆노무현 투신시 사회적 과잉 추모 열기에 일침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로는 다양한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며 애국 운동을 펼쳤다. 자유민주민족회의 의장 등을 지냈고 1998년에는 대한민국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장, 2007년 헌정회장, 2008년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장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또, 1999년에는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운석 장면 박사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을 맡아, 장면 박사 기념사업회 출범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 자살로 국가적인 혼란이 초래되자, 사회의 과민 반응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이철승 전 총재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은 퍽이나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면서도 "과례(過禮)도 비례(非禮)라는 말이 있듯이, 투신 자살한 대통령을 이승만 박사나 백범 김구와 동렬에 놓고 국민장을 하는 것은 국가의 예법에 두고두고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정론을 펼쳤다.

    ◆서울삼성병원에 빈소 마련, 발인은 내달 2일

    이들인 이동우 전 민주국민당(민국당) 당무위원은 이철승 전 총재의 뒤를 따라 정치에 투신해 서울 서대문갑에서 출마하기도 했으나 국회에 입성하는데는 실패했다. 서울 서대문갑은 현 여권의 이성헌 전 의원, 현 야권의 우상호 의원이 다섯 번째 맞붙으며 20년 동안 혈투를 벌이고 있는 지역구로, 이동우 전 당무위원은 이 지역에서 민국당 등 제3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색이 다른 김진만 전 국회부의장의 아들 김택기 전 의원을 사위로 맞았다. 사돈인 김진만 전 부의장은 이철승 전 총재와 똑같이 7선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강원도를 연고로 자유당~공화당~유정회에서 활동했다. 김진만 전 부의장은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의 부친이기도 하다. 사위인 김택기 전 의원은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16대 총선 강원 태백·정선 선거구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삼성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내달 2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