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치산 포함된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제' 서울 한복판서 열려

    민주화와는 전혀 관련 없는 빨치산 출신 정순덕(2004년 사망) 또 다시 영정사진에 올라.

    김필재  
     
    保守단체들이 그동안 ‘빨치산 추모제’로 비판해온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제'가 지난 7일 서울 한복판(청계광장)에서 또 다시 열렸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는 홈페이지에서 “추모연대는 민주화 과정에서 돌아가신 민족민주열사-희생자들의 추모(기념) 단체 및 유관단체가 연대한 단체로서 민족민주열사 희생자들의 뜻을 계승하여 정의와 자주, 평등세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조갑제닷컴> 확인결과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가 주도하는 이날 행사의 추모 인물 중에는 민주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빨치산 출신의 정순덕(2004년 사망)이 또 다시 영정사진에 올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정순덕은 경남 산청 출신으로 6·25전쟁 발발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1951년 빨치산이 됐다. 정순덕은 국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쫓겨 가 빨치산 활동을 지속하다 1963년 11월 체포됐다. 이후 정순덕은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 간 복역하다 1985년 8월 가석방됐다.

    김대중 집권 시기인 2000년 미전향 장기수들이 북한으로 갈 때 정순덕은 전향을 했다는 이유로 北送(북송)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정순덕은 2003년 7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왜 북한에 가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전향서를 썼다고 하지만, 그 때는 강제로 한 거니까 인정할 수 없는 거지”라며 “북한에 가야 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뉴스1> 보도에 따르면 이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대회사를 통해 “싸우다 숨진 열사의 가족들이 자랑스럽다”며 “20세기와 21세기에 걸친 모든 인류의 영광은 여러분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은 “여전히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에 견디다 못해 목숨을 내놓고 있다”며 “전체의 힘을 모아 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주> 아래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정순덕의 약력.

    -1933년 6월 20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 출생
    -1950년 9월 남편 찾아 지리산에 입산
    -1951년 2월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에 편입
    -1953년 9월 노영호 부대에 편입, 덕유산으로 옮김
    -1963년 11월 입산 13년 되던 해 지리산 대원골에서 토벌대와 전투 중 다리 총상, 체포됨 (오른쪽 다리절단) 그 뒤 재판에 회부, 무기징역 선고, 대구, 공주, 대전교도소 등 23년 간 옥고
    -1985년 8월 15일 8·15 특사로 가석방.
    -1989년 부산에서 가족공장 등 노동에 종사
    -1995년 8월 낙성대 ‘만남의 집’으로 들어감
    -1999년 3월 20일 뇌출혈로 쓰러져 뇌수술 받음
    -2000년 9월 2일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요구 했으나 당국의 거부로 못 감
    -2001년 2월 6일 “전향 무효” 선언과 함께 2차 송환 촉구
    -2004년 4월 1일 오후 7시15분, 통일조국 그 날을 보시지 못한 채 운명

    동지의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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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년 경남 산청에 태어난 동지는 ’51년 2월 유격대원이었던 남편 성석조를 찾아 입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중 ’63년 12월 입산 13년 만에 지리산 내원골에서 최후의 여자 빨치산으로 체포됐다. 동지는 체포 당시 입은 총상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 당한 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85년 가석방으로 출소할 때까지 복역하였다. 출소 후 갖은 고생을 겪다가 비전향 장기수 생활터인 서울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지냈으며,  ’99년 뇌출혈로 쓰러져 왼쪽이 마비되었고 그 후로 인천 나사렛한방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였다. 쓰러지기 전까지도 북에 간 비전향장기수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며 2차 송환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투병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04년 3월 16일 끝내 의식을 잃고 사투를 벌이던 중 4월 1일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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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 후 파주 보광사에 위패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