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호 실패로 죽은 박정희-육영수

  • 경호의 원칙을 어겼다.

    趙甲濟    

    1974년 3월1일 오전 朴正熙 대통령은 부인 陸英修여사와 함께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55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때 외국대사들이 同부인하여 참석했는데 대통령 경호원들이 핸드백을 물품보관소에 맡기도록 했다. 경호원들은 부인들의 핸드백을 남자 경호원이 검색할 수가 없어 보관소를 운영한 것이었다. 경호원들은 대사 부인들에게 손수건만 갖고 입장하도록 했다.
      
       이 행사 뒤에 駐韓외국사절단의 부인회에서 陸여사에게 과도한 경호조치라고 항의했다.
    陸여사는 朴대통령에게 이를 전했고, 朴鐘圭 경호실장은 혼이 났다.
    朴실장은 경호과장에 대해 정직처분을 내렸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朴실장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라도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과잉 검문 검색을 하지 않도록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그해 8월15일 文世光은 국립극장에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경호원의 검문을 피했다.
    陸여사가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영향을 끼친 셈이다.
      
       文世光은 1974년 8월15일 오전 7시 조선호텔에서 프론트로 전화를 걸었다.
       '국립극장에 가야 하는데 오전 8시까지 승용차를 대기시켜주세요. 출발은 오전 9시입니다'
       文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여 바지 허리춤에 숨기고 오전 8시40분에 M-20 포드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車中에서 운전기사에게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1만원권을 주었다.
    文은 또 왼쪽 옆구리에 숨겨둔 권총으로 손을 넣어 총의 공이치기를 머리 위로 올려놓았다.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결정적 실수가 된다.
      
       정각 9시 文世光을 태운 승용차는 국립극장 정문에서 검문을 받지 않고 들어가 극장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리더니 뒷문을 정중하게 열어주었다. 중절모를 쓴 文世光은 기사가 공손히 절을 하는 가운데 계단을 올라갔다. 文은 왼쪽 현관을 통해 극장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검문하지 않았다.
      
       당시 현관에는 대통령 선발 경호원이 3명, 경찰관이 8명 근무중이었다.
    文은 비표도 없이 통과했다. 중절모를 쓰고 으시대는 文의 모습을 본 경호원들은 고위인사라고 생각하여 통과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그 뒤 조사에서 '3.1절 행사 때 외국인에 대한 경호를 너무 심하게 했다고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그날엔 소극적으로 대했다'고 변명했다.
      
       극장안으로 들어온 文은 1층과 2층 로비를 오고가면서 저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는 통로에 카핏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는 朴대통령이 지나갈 때 저격하려고 카핏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장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다가는 경호원의 검문을 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10여명이 권총을 차고 로비를 오가고 있었다.

    文은 로비 경호원에게 먼저 다가가서는 '우시로쿠 일본대사와 스즈키씨를 기다리는데
    혹시 오지 않았느냐'고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극장 로비는 여기 뿐인가요'
       '2층에도 있습니다'
       경호원은 文을 2층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文은 '아,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었지'하면서 1층으로 되돌아왔다.
    경호원은 다른 간부 경호원에게 文을 인계했다.
    경호원은 '저 분은 일본대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을 것이다.
    인계받은 경호원은 文을 보고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나타났다.
    경호원은 文을 잡고는 기둥 뒤에 있으라고 했다.
    文은 朴대통령이 입장하는 것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약 10분 더 로비에서 머물렀다.
      
       文은 다시 로비 근무자에게 다가가서 일본어로 '대통령의 얼굴을 한번 보고싶은데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근무자는 文의 입장을 묵인하는 표정을 지었다.

    文이 로비에서 극장안으로 들어가려니 출입구 근무자가 비표를 달지 않은 그를 제지했다.
    文은 로비 근무자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들어가도 좋다고 이야기했다'고 둘러대었다.
    출입구 근무자가 로비 근무자를 바라보니 그는 무표정이었다.
    출입구 근무자는 이를 들여보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극장안으로 들어온 文을 안내하여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자리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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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陸英修 여사 피살 사건 5일 뒤인 1974년 8월20일 朴대통령은 정상집무에 들어갔다.
    이날 金鍾泌 국무총리는 오전 오후 두 차례 대통령을 만나 陸여사 서거 후의 國政방향에 대해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金총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吳定根 국세청장을 추천했다. 朴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吳定根은 5.16 군사혁명 때 출동한 해병여단의 병력을 이끈 대대장 출신(당시 중령)이었다. 가장 먼저 한강다리를 넘은 해병대 병력의 선두 지휘관이었다.
      
       이날 오후 2시55분에서 3시20분 사이 朴대통령의 사위 韓丙起 대사가 청와대로 들어왔다.
    韓대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車智澈 공화당 국회의원을 추천했다. 이날 오후 4시33분부터 5시20분 사이 朴대통령은 車의원을 불러 요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통보했다. 물론 車의원은 충성을 맹세했다.
      
       8월21일 오후 2-3시 사이 朴鐘圭 실장이 대통령에게 離任인사를 하고 신임 車 실장이 취임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임무교대가 되었다. 朴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랫동안 모실 인물이 陸여사에서 車실장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10.26 사건을 예약한 인물교체였다.

       누가 車실장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고 왜 대통령이 그를 발탁했는가를 놓고 말들이 많지만 모든 결정은 朴대통령의 몫이다. 기자가 입수한 朴대통령 재임기간중의 면담일지를 읽어보니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발탁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陸여사 피살 이전에도 朴대통령이 가장 자주 獨對했던 정치인은 단연 車智澈 의원이었다. 이는 朴鐘圭 경호실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호실장이 면담을 주선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잦은 獨對는 이뤄질 수 없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한 달 전 공수단의 車대위를 포섭하여 金鍾泌씨에게 선을 보인 다음 朴正熙 소장 앞으로 데려간 사람이 바로 朴鐘圭 소령이었다. 5월16일 서울시청 앞에서 찍힌 유명한 사진에서 朴소장 양쪽에 호위로 서 있는 두 사람 또한 朴鐘圭와 車智澈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수부대 훈련도 함께 받았다. 朴실장은 車의원을 동생처럼 좋아했다. 물론 朴대통령의 車의원에 대한 신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했을 것이다. 朴실장은 친한 사람들에겐 “車의원이 나의 후임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車의원은 당시 好評을 받는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공수부대 장교출신답지 않게 신중하고 공부를 많이 하며 청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호실장이 되면서 그의 인격의 일부로 나타나는 오만방자함도 보이지 않을 때였다. 朴鍾圭 경호실장도 후임으로 車의원을 추천했을 가능성이 높다.
      
       朴대통령은 車실장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金日成 정권이 지령한 朴대통령 살해는 실패했으나 陸여사 피살로써 반쪽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車 실장은 과잉경호를 했다. 朴 대통령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였다. 심지어 김재규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도 제한하였다. 朴 대통령은 대중과 멀어졌다.
       정작 본인은 결정적 시기에서 경호의 원칙을 어겨 경호대상인 朴 대통령도 本人도 죽었다. 1979년 10월26일 밤 정보부가 관리하던 궁정동 식당으로 대통령을 모시고 가면서 그는 권총을 차고 가지 않았다. 김재규의 총을 맞은 그는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다. 가슴 관통상을 당한 朴 대통령을 버려두고.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