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가운데 또 몇 달이 지나 1978년 9월 12일이 되었다. 이날 오후, 웬반 짝 중위가 나를 복도에 불러내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나를 앉히더니 “심심한데 농담을 해도 좋습니까?”하고 물었다. 통역은 베트남 말을 잘하는 안 영사가 했다. 나는 “좋습니다. 말하시오”하고 대답했다.

    “북조선에 가지 않겠습니까?”하고 그가 나에게 물었다.
    “안가겠습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잘라 말했다.
    “북조선도 조국인데 왜 안가려 합니까?” 그의 반문이었다.
    “정치이념이 다르고 또 처자들도 남한에 있습니다.”
    이말이 끝나자 짝 중위는 더 물어보지 않았고, 나는 일어서서 내 감방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결혼기념일 24주년, 돌아갈 수 없는 길. 북한노동당 3호 청사 요원들의 신문이 시작됐다.

    1978년 9월 25일은 결혼기념일 2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침에 시름에 잠겨있는데 간수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나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으라고 했다. 나는 긴 양복바지와 반소매 남방셔츠를 입고 플라스틱제 샌들을 신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형무소 마당으로 나가보니 안닝노이찡 요원과 흰색 세단 한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닝노이찡 수사과장 광대뼈의 보좌관인 경찰 중위가 나를 세단 뒷좌석 한가운데 앉히고 그 오른쪽에 탔으며, 내 왼쪽에는 기병소총을 든 안닝노이찡 하사관이 앉았다. 나를 태운 세단은 치화형무소 정문을 빠져나가 호치민 시내를 달렸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으나 안닝노이찡 요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신문은 치화형무소 안에서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형무소 바깥으로 태우고 나가는 것으로 보아 석방을 눈앞에 두고, 베트남 정부의 외무부 차관이 나 또는 내무부 이민국장 쯤 되는 고위관리가 미안하다는 외교적 회유 제스처를 쓰기 위한 면담장소로 데리고 가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공산당들이 워낙 속임수를 잘 쓰기 때문에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호치민시 꽁리가 189번지 2층집 현관 앞에서 세단은 멈추고 모두 차에서 내렸다. 건물은 티유 정권당시 인도네시아 총영사관이었던 아담한 새집이다. 나는 안닝노이찡 일꾼들의 감시경호를 받으며 계단에 올라가 2층 방문 앞에 섰다. 광대뼈 보좌관이 문을 열었다. 나는 방안에 들어서면서 7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책상을 앞에 놓고 나란히 앉아있는 두사람을 보는 순간 멈칫했다.

    베트남인이 아니다. 그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분명한 북한 사람들이었다. 짙은 하늘색 넥타이를 매고, 하늘색 와이셔츠에 흑 회색 양복 상하의를 입고 있는 자는 생김새가 어쩌면 그렇게도 김일성을 빼닮았는지 얼핏 김일성의 가까운 친인척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옆에 흰 노타이셔츠를 입고 앉아 있는 자도 생김새가 틀림없는 북한 사람이었다. 김일성을 닮은 자는 나이가 45세에서 47세쯤 되어 보이고, 흰 노타이셔츠를 입은 자는 김일성을 닮은 자보다 한 두살 정도 젊어보였다.

    광대뼈 보좌관은 북한 요원들로부터 3.5미터쯤 떨어진 곳에 놓인 초라한 철제의자에 나를 앉힌 후 밖으로 나갔다.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는구나 하는 예감에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미 죽을 각오가 돼 있는 몸, 두려움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나의 기를 꺾으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눈싸움에 밀릴 내가 아니었다. 나도 그 자들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눈으로 맞대응 했다.

     

    ◇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고. 우리 한번 동족으로서 이야기해 봅시다"

    “북반부에서 왔수다.”
    김일성을 닮은 자가 위압적인 말투로 신문을 시작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독일과 일본 전범들이 사형당한 예를 들면서 나도 그렇게 처형될 것이며, 베트남 정부는 나에 대한 처리문제를 전적으로 자기에게 일임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내가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적 양심에서 인민 편에 서서 일한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관대히 용서하고 인도적 대우를 해주겠노라고, 지난번 광대뼈와 똑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국제협약인 비엔나협정에 의해 국제외교관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어 당신들의 신문에 답변할 의무가 없고, 당신들은 나를 신문할 권리가 없으며, 나는 절대로 전향하지 않는다고 종전에 안닝노이찡을 상대로 펴내려오던 정정당당한 발언을 또다시 했다. 그런 뒤 입을 굳게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흰 노타이셔츠를 입은 자가 내 입을 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답변할 자료가 없어서 말을 못하는 것이지 당신이 무슨 외교관이오? 너무 주관적으로 말하지 마시오. 우리가 언제 당신보고 전향하라고 했소? 공연히 말을 만들어 주관적인 이야기만 하지 마시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야말로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오. 전향이 다른 것이오? 나보고 과거를 청산하고 인민 편에 서서 일하라는 것이 전향이지 뭐요. 딴 게 전향이오? 그런 유치한 소리는 하지 마시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라고 쏘아준 뒤 오른손을 내저었다.

    “비엔나협정은 선량한 외교관만 보호하게 되어 있지 당신처럼 양의 탈을 쓴 이리같은 가짜 외교관은 보호하지 말라고 되어있소.”
    흰 셔츠 입은 자가 또 말했다. 이 말을 듣고나니 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왜 자꾸 말을 시키는 거요? 이번 한 마디만 더 하고 일체 대답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겠소. 비엔나협정 몇 조 몇 항에 당신이 말한 그따위 구절이 써있소? 어린애 같은 유치한 말로 웃기지 마시오. 내가 외교관인지 아닌지는 유엔에 물어보시오. 외교관 명단에 내 이름이 명기되어 있소.”
    북한정보공작요원들은 말문이 막히는듯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선임요원인 김일성을 닮은자가 부드럽게 말하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소. 우리들은 같은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동족이오. 우리 한번 동족으로서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 당신의 앞날을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오. 당신에게 유리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오.”

    “왜 자꾸 이야길 하게 만드시오? 이번만 말하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더이상 말하지 않겠소. 아니 그래, 내 처리 문제를 전적으로 일임받을 정도로 베트남 정부와 친하다면서 불법구속되어 3년간이나 갖은 고생을 하면서 옥고를 치르고 있는, 피가 섞인 동족을 석방시켜 달라는 소리는 한마디도 않고, 이제와서 과거를 청산하면 관대히 인도주의적 대우를 해주느니 유리하니 뭐니 그 따위 모순된 말이 어디있소?”

     

    ◇ 설상가상의 비극, 손으로 귀를 막다.

    김일성 닮은 자가 오른손으로 책상을 탕 치면서 “이 새끼!”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어디다 대고 이 새끼라는 거야?”하고 나는 맞섰다. “이 새끼가!”하면서 김일성을 닮은자가 벌떡 일어나서 양복 상의를 확 벗으며 나를 때리려고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불쑥 일어서며 “야, 이 새끼야! 때릴테면 때려봐라”하고 그를 향하여 책상을 비켜가 좌전방으로 2보 전진하여 격투 태세를 갖추었다. 나이는 나보다 약간 젊기는 하였으나 뚱뚱한 두부살로 보였다. 나는 몸이 비록 마르기는 했으나, 태권도 유단자이며 수도(手刀) 격파력과 오른발 옆차기의 파괴력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격투가 벌어지기 전에 흰 셔츠 입은 자가 재빨리 북한정보공작선임요원을 붙들고 말렸다.

    상의를 벗은채 북한선임요원은 의자에 앉아 씩씩거렸고, 나도 흥분한 상태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흰 셔츠 입은 자가 민족이니, 조국이니, 인간이니 너절하게 떠들며 원한다면 고향에 있는 우리 누님의 소식을 전해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나는 굳건히 앉아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래서야 신문이 안 되겠다고 판단한 듯, 그들은 나를 복도로 내보내 안닝노이찡 감시 하에 약 20분간 쉬게 하더니 다시 불러들였다. 신문은 다시 시작 되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이 듣기 싫어 자주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북한선임요원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오늘은 이만 끝낼테니 방에 돌아가서 잘 생각한 뒤 다시 만납시다”고 했다. 그런 뒤 음성을 낮추며 “우리들은 같은 민족으로서 당신을 위해서 이야기 한 것이오. 북반부 누님들과 조카들 소식을 원하면 언제든지 알려주겠소. 잘 생각해 보시오.”라고했다. “다시 만날 필요없소. 나는 내 권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할테니 이것으로 끝냅시다. 38선과 휴전선 이 강토를 양단시킨 것도 민족의 비극인데, 이렇게 만나 조상의 피를 나눈 동족끼리 이 새끼 저 새끼 해가며 서로 욕설을 퍼붓는 것은 민족의 비극 위에 또 하나의 불행을 첨가하는 설상가상의 비극이오. 이것으로 깨끗이 끝냅시다!”
    나는 일어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방문을 나서려다 돌아서서 그들 쪽을 바라보며 “이것이 여러분과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이오. 여러분들, 가족과 함께 안녕히 계시오”하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왔다.

    그러나 내 요청은 무시되었다. 9월 29일 오후 나는 또 북한정보공작요원들의 신문장소로 불려갔다. 흰 셔츠를 입은 자가 입을 열었다.
    “전번에는 서로 이성을 잃고 감정에 치우쳐 제대로 이야기를 못했는데 오늘은 민족적 견지에서 동족끼리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이성을 가지고 말했소. 할 말은 그날 다했으니 앞으로는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답변하지 않겠소.”
    “당신이 원한다면 북반부 고향에 있는 당신 누님들과 조카들의 소식을 전해줄 용의가 있소.”
    전에 한 이야기를 북한선임요원이 되풀이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흰 셔츠 입은 자가 낮은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외교관이라고 주장하니 그럼 그렇다고 해둡시다. 또 전향도 안하겠다니 그것도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남북회담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동족으로서 이야기해 보자는 겁니다.”

    말하는 솜씨나 어조로 보아 그들은 손발이 잘 들어맞는 이상적인 단짝이었다. 뚱뚱한 두부살 선임요원은 야성적인 공갈 협박형이고, 흰 셔츠를 입은 자는 은근히 상대를 함정으로 유도하는 술책형 이었다. 그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별의 별 말들을 다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입을 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입은 마음의 자물쇠처럼 2중, 3중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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