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北 3호 청사요원들의 '한국 민간인 포섭공작' 기승

    한편 남한에서는 사이공 함락 하루 전인 4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이 “금년에 북한 공산집단이 불장난을 저지를 가능성은 농후하다. 남침할 것이다, 안 할 것이다 등의 정세분석이나 토론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면, 나 자신도 650만 서울시민과 함께 서울을 사수할 것이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잇달아 5월 13일, 국무회의는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 9호’를, 5월 20일에는 ‘학도호국단 설치령’을 의결했다.

    이런 분위기는 사이공에 억류되어 있는 한국 외교관 석방에는 모두 부정적인 장애요소들이었다. 더구나 억류된 한국 외교관 중에는 한국의 1급 비밀을 취급하는 내가 있었다. 북한 김정일이 직접 엄격히 통제하여 정보수집과 정보공작, 정보수사를 담당하는 북한 노동당 3호 청사가 나를 정치적·외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치는 점차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불안요소였다.

    8월 하순까지 사이공에 있는 북한 3호 청사요원들의 한국 민간인 포섭공작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미 포섭돼 있던 김모 외에 이모, 허모 등이 추가로 포섭되었다. 이들과 북한 3호청사 요원들과 안닝노이찡의 홍, 광대뼈 등과는 밀접한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피부색이 서양인처럼 희어서 튀기라는 별명을 가진 안닝노이찡 경찰장교는 김모와 함께 다니며 제일 열심히 뛰고 있었다. 이 튀기는 평양에 유학하여 김일성대학을 졸업했으며, 그 후에도 평양에 오래 머물러 10년간 북한에서 살았다. 김일성과 악수까지 한 바 있으며, 한국인으로 착각할 만큼 한국말이 아주 유창하였다. 이 튀기의 이름이 즈엉징 특(楊政識)이라는 사실은 먼 훗날 치화형무소에서 그의 외삼촌에 의해서 밝혀졌다.

     

  • ▲ 2002년 9월 6일 신라호텔에서 만난 이대용 장군(좌)과 즈엉징 특 前 주한 베트남 대사(우) ⓒ 자료사진
    ▲ 2002년 9월 6일 신라호텔에서 만난 이대용 장군(좌)과 즈엉징 특 前 주한 베트남 대사(우) ⓒ 자료사진

     - "구름이 흘러가고 별이 나타날 때가 올 것인가"

    8월 31일 안닝노이찡 수사과장 광대뼈가 홍을 대동하고 내가 머무르고 있는 뚜도가 171번지 콘티넨탈파라스 아파트로 와서, 아파트 주인인 인도인 부부를 만나 장시간 조사를 하고 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때부터 나에 대한 감시는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어두운 새벽, 옥상에 올라가서 몰래 맨손 체조 하는 나를 감시하기 위해 아파트 주인의 월남 여자식모가 아예 옥상에 침대까지 갖춰놓고 동정을 살폈다. 그런 것들이 싫어 나는 방문을 굳게 잠그고 방안에만 눌러앉아 있기로 했다.

    밀폐된 방안의 공기는 탁했다. 밤이 깊어지면 나는 어둠 속에서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살그머니 열어놓고, 안락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맑은 공기를 마셨다. 계절이 우기여서 흐린 날씨가 많으며 비가 자주 내려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는 별이 나타날 때까지 몇시간 이고 기다리며 앉아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구름이 흘러가고 별이 보이면, 내 처지가 비오고 바람 부는 궂은 날씨인데, 저렇게 구름이 흘러가고 별이 나타날 때가 올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9월 22일과 23일, 당시 나는 모르고 있었으나 북한노동당 3호청사 정보공작요원 세 명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서병호 영사, 안희완 영사, 민간인 김종옥, 이상관들을 신문했다. 그들은 한국외교관에 대해서도 “야! 자! 너!” 해가며 반말로 공갈협박을 하고, 또 그럴듯한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징용되어 월남에 간 이래 30여 년간을 그 곳에서 살고 있던 강서신교민회 부회장이 소환되어 9월 24일 안닝노이찡에 갔다고 한다.

    그랬더니 수사과장 광대뼈가 강 부회장을 데리고, 내가 묵고 있는 콘티넨탈파라스아파트를 마주보고 있는 에덴아파트 6층 어느 방으로 갔다. 거기에는 북한노동당 3호청사 정보공작요원 세 명이 있었다. 광대뼈는 강 부회장을 그들에게 인계하고 돌아갔다. 제3호 청사 일꾼들은 강 부회장을 신문했다. 두 시간 반에 걸친 신문에서 주로 잔류 한국 외교관 중 최고선임자인 나에 대해 많이 물어봤다.

    신문을 받다가 좀 쉬는 시간에 강 부회장은 약 30미터 떨어진 맞은편 건물인 콘티넨탈파라스아파트를 건너다보았다. 바로 곧장 마주보이는 방은, 나를 포함해서 한국인 여러 명이 매끼 식사를 함께 하는 해군하사관 출신 임대인 가족의 식당 방이었다. 식당 창문이 열린 사이로 한국인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똑똑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식당 방 양쪽에 줄지어 연결된 임대인 가족 4명의 침실, 김상우 목사의 침실, 김병용의 침실도 마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에덴아파트 쪽의 움직임이 수상하여, 나는 두 달 전부터 식사할 때에는 꼭 그쪽 창문을 닫고 두터운 커튼을 치도록 했다. 그러나 내가 식당을 떠나면 그쪽 창문을 열고 커튼을 젖혀 놓고들 있었다. 이러는 동안 한국 민간인 지태영, 허춘, 한금선, 지원 등이 안닝노이찡에 추가로 체포되어 갔다.

    북한노동당 3호청사 정보공작 일꾼(요원)들은 한국인 신문실을 사이공 부둣가에 있는 매저스틱 호텔 502호실과 503호실로 옮겼다. 9월 26일에는 강 부회장과 같이 월남에서 30여 년 간을 거주한 유남성 노인이 안닝노이찡의 소환장을 받고 매저스틱호텔 502호실과 503호실로 가서 신문을 받았다. 세 명의 제3호청사 정보공작요원들 중 한명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유 노인과 고향이 같았다. 신문실에는 베트남 안닝노이찡 수사과장 광대뼈와 홍이 배석하고 있었다. 그들이 제3호 청사 정보공작 선임요원을 마치 전속부관이 장성급을 대하듯이 굽신거리는 것으로 보아 제3호청사 정보공작선임요원의 계급은 소장이나 대좌로 여겨졌다고 유 노인이 전해주었다.

    - 강제소환, 그리고 나의 마지막 유언.

    9월 27일부터 29일까지 한국 민간인 여러 명이 줄줄이 소환되어 매저스틱호텔로 불려가 3호 청사 정보공작일꾼들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그들은 소환 당사자들의 신상문제가 아니라 내 신상문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캐물었다고 한다. 그들이 하는 짓으로 보아 내가 곧 체포될 것이라고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체포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나는 옆방에서 기거하며 내 비서관이나 특별보좌관 역할을 하는 신상범 서기관을 방으로 불러 9월 29일 오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다.

    첫째, 내가 체포되면 이 참사관이 한국인 통제를 하고, 프랑스 모로 서기관과 접촉하여 내가 해온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상황보고와 필요한 요청을 우리 외무부장관에게 계속해 주기 바란다.

    둘째, 내가 체포된 후 형무소에 있게 되면 계속 항거하면서 지내겠으나,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어 끌려갈 때에는 자결하여 목숨을 끊겠다.

    그 경우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대통령 각하께 유언으로 부탁 올리니, 각하께 말씀해주기 바란다. 그것은 내 자식들이 아직 어리므로 그 애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지급해서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셋째,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터이니 김 대사의 허물을 묻지 말고, 그를 정부에서 다시 등용해 주기를 건의한다.

    사이공 함락 이후 신상범 서기관은 위험한 일,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나를 잘 보좌해 왔다. 나는 유언이 신상범 서기관에 의하여 빈틈없이 실행될 것으로 굳게 믿으며, 그를 옆방으로 돌려보냈다.

    1975년 10월 3일 오후 한시 조금 전, 시에스터 시간이라 아파트가 쥐죽은 듯이 고요한데 복도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서 그쪽에 귀를 기울였다. 불길한 예감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체포하러 온 광대뼈 일행이었다. 순간 베란다를 타고 아파트를 빠져나가 탈출을 결행해볼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곧 지워버렸다. 혼자만 탈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또 탈출하려고 해도 이제는 안닝노이찡의 경계가 철저해서 절망적이었다. 나는 잠겨있는 문을 열어서 광대뼈 일행을 맞아들였다.

    이름이 ‘린’이라고 하나 잘 알수 없고, 계급이 대위라고도 하고 소좌라고도 하며 비밀에 싸여있어 잘 알 수 없으나, 별명이 광대뼈인 안닝노이찡수사 과장이 앉은 나를 일어서라고 하더니 베트남말로 구속영장을 읽었다. 그리고 그 구속영장을 한국말로 읽으라고 튀기라는 별명을 가진 즈엉징 특에게 주었다.

    “성명 이대용. 직업 외교관. 베트남 혁명 사업을 방해했기에 체포함. 1975년 10월 3일.”

    그리고 구속영장에 서명한 호치민(사이공)시 검찰위원장인가 하는 자의 직책과 이름을 읽었다. 광대뼈 일행은 내 방을 수색하고 소지품을 모두 압수한 후,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를 체포하러 온 안닝노이찡 경찰은 모두 아홉 명이었으며, 세단 한 대와 지프 한 대를 타고 왔다. 광대뼈 일행은 치화형무소로 직행하여 정치 중형범들이 수감되는 격리감방인 A동 4층 2호실에 나를 수감했다.

     

  • ▲ 2002년 9월 6일 신라호텔에서 만난 이대용 장군(좌)과 즈엉징 특 前 주한 베트남 대사(우) ⓒ 자료사진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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