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짠반뛰엔 저택과 한국대사관저와의 거리는 약 800미터이다. 차를 몰고 대사관저에 도착해보니 이미 대사, 참사관 2명, 서기관 2명, 영사 2명, 통신사 2명, 그리고 대사관 고용원, 신문기자, 목사 등 16명은 떠나버리고 정 대령, 서영사, 해군사병2명, 예비역 해군하사관 가족 4명이 남아있었다.

    ◆ 한국대사관의 묘연한 행방, 배당된 헬리콥터가 없다

    한국대사관저와 제3아셈브리 포인트는 프랑스식 구형의 넓은 저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지고 서 있는 약 70미터 거리의 이웃이었다. 나는 10명을 인솔하고 제3아셈브리 포인트에 도착했다. 그곳은 25미터 정도 높이의 건물로 유세이드 직원과 가족 전용 전세 아파트였다. 옥상에는 60명을 태울 수 있는 미군 헬리콥터 한대가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런데 이상한 것은 먼저 와있어야 할 한국대사관 직원이 한명도 와있지 않았다. 경비원들에게 물어봤으나 그들은 한국대사관 직원들의 행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혹시 우리가 잘못 온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 마저 들었다. 철수작전 실행에 있어 꼭 지켜야 할 철칙은, 철수부대나 단체는 철수본부에서 지정해준 탑승 장소로 가서 제시간에 헬리콥터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지정해준 탑승 장소로 가지 않고 딴곳으로 가면, 그곳에는 그 부대나 단체에게 배당된 헬리콥터가 없다. 잉여단체가 되어 철수를 못하게 된다.

    조금만 더 알아보고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때마침 한국 대사 승용차 운전기사가 대사 승용차를 홀로 몰고 우리가 있는 앞의 로터리를 돌고 있어 소리쳐 세웠다. 그 운전기사는 대사관저로 무엇인가 가지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사가 지휘하고 먼저 떠난 인원은 미국대사관에 가 있다고 했다. 그는 대사관 직원 등 16명이 대사관저를 떠날때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선두에 섰으며, 제3아셈브리포인트 출입문 앞에 도착하여 차를 세우려는 순간, 차에 타고있던 어떤 인사가 차를 세우지 말고 로터리를 또 돌라고 해서 로터리를 한 바퀴 더 돌았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그 인사가 다시 미국대사관으로 가자고 해서 그쪽으로 차를 몰았으며, 뒤따라오던 우리 대사관 직원들을 태운 모든 승용차가 덩달아 미국대사관으로 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중에 뼈에 사무치게 후회했지만, 제3아셈브리포인트에서 나는 10명을 지휘하고 우리에게 배당된 미군 헬리콥터를 탔어야 했다. 철수작전의 원칙상 미국대사관으로 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육군대학에서 철수작전 교관을 3년간이나 지냈다. 우리나라에서 서울 철수 작전계획을 최초로 작성한 작전참모는 바로 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자그마한 철수 수송 실행에 실패하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실책이었다. 그러나 또 가만히 살펴보면 운명이기도 했다. 내가 대사관 소각장에 간 것이 실책의 시발이었다. 

    미국대사관으로 부터 한국대사관 외교관들은 제3아셈브리포인트로 가서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철수하라는 연락이 왔을때 내가 우리 대사관저에 있었다면, 대사관 직원들이 제3아셈브리 포인트에서 우리를 태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미군 헬리콥터를 버리고 다른곳으로 무작정 가는 과오를 절대로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대사관 절대 다수의 인원과 고위층이 미국대사관에 가있는 것이다.

    훗날 그때 일을 되돌아보니, 내가 그날 아침 비밀문서의 중요성만 생각하고 직접 대사관 소각장에 달려간 것이 잘못이었다. 이달화 소령과 이문학 중령만을 보내도 되는 일이었다. 또 대사관 소각장에서 한국대사관저로 돌아오는 도중에 짠반뛰엔 집에 들러 약 15분간 정보를 수집한 것도 큰 잘못이었다. 철수 본부장은 중요한 시기에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15분간의 허비가 한국대사관 인원 철수를 실패시킨 요인의 하나가 됐다.

    ◆ 차선의 헬리콥터 탑승장, 미국대사관 전경

    미국대사관에는 미국인 약 6천명을 철수시키는 철수본부와, 그 총수(總帥)인 마틴대사가 있다. 우리측 고위층이 마틴대사와 협조를 잘한다면 대사관 인원 27명에 대한 수송용 헬리콥터를  추가로 배정 받을수도 있을 것이다. 제3아셈브리포인트가 우리 대사관 인원 27명의 철수를 완벽하게 보장해주는 최선의 헬리콥터 탑승장이라면, 미국대사관은 차선의 헬리콥터 탑승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미 양국 대사관 고위층의 협조가, 지난번 캄보디아에서 철수시 김세원 대사와 주캄보디아 미국대사와의 긴밀한 협조수준을 따라갈 수 있을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차선의 방책이지만 미국대사관에서 한국대사관 인원들의 헬리콥터 탑승은 가능할 것이라 여겼다. 내가 10명을 인솔하고 미국대사관 본관마당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한국대사관 고위인사 2명은 마틴 미국대사가 있는 대사관 본관의 철수본부로 올라갔다고 했다. 본관마당에 있던 14명의 한국대사관 인원들은 대사관 별관으로 이동하라는 미 대사관 철수통제관의 요청에 따라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가 지휘하고 간 나를 포함한 11명이 이들과 합류했다.

    미국대사관은 대지가 6천평쯤 되어보였고, 네모난 대사관 대지 한가운데를 높이 약 5미터의 벽돌담이 동서로 세워져 두지역에서 갈라놓고 있었다. 남쪽에 있는 것이 본관 지역이고, 북쪽에 있는 것이 별관 지역이었다. 베트콩이 미국대사관 한쪽을 점령하더라도 다른 한쪽에서 저항할 수 있게 이 지역을 견고한 벽돌벽으로 갈라놓은 것이며, 이 두개 지역을 연결하는 통용문이 벽 한모퉁이에 빠끔히 뚫려 있었다. 이 통용문을 봉쇄하면 본관지역과 별관지역은 서로 왕래를 할 수 없게 된다.

    한국대사관 직원 및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민간인들을 합친 25명은, 통용문을 통해서 본관지역으로부터 별관지역을 이동했다. 별관지역은 미국 민간인들, 참전국가의 외국인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리고 인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늘어났다. 한국 민간인들의 수도 많이 불어나고 있었다.

    오전 10시경부터 본관과 별관 사이의 통용문이 미 해병대에 의해 차단 봉쇄되고, 일단 별관지역에 들어온 사람들은 본관지역으로 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이 통용문은 미국대사관 철수본부가 인정하는 귀빈과 미국철수 통제관들만이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관문으로 변해버렸다.

    미국대사관 직원과 가족, 국제휴전 감시위원단 소속 인원들을 철수 수송하는 대사관 본관 옥상의 제1아셈브리 포인트에서는 오전 10시 30분경부터 철수 수송작전이 시작되어 헬리콥터들이 남지나해상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별관지역에 있는 인원들의 철수수송을 위한 헬리콥터 탑승장은 준비된 것이 없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본관마당에 2개소를 만들려고 했으나, 큰 나무들을 베어야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마냥 시간을 끌고 있었다.

    10시 30분경, 미국대사관본관의 철수본부에 가있던 한국고위 외교관 두 명이 별관지역에 나와서 김상우 목사를 만나고 다시 철수본부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별관지역의 철수질서를 통제하고 있는 미국통제관의 요청에 의해, 외국인들은 국적별로 한 장소에 집결 정렬하여 앉아서 대기하게 됐다. 이때 인원을 점검해보니 한국인은 168명이고, 한국인의 월남부인들과 자녀들, 그리고 월남부인들의 친정식구 등 모두 40명쯤이 우리 한국인 집단 속에 끼여있었다.

    미국통제관들은 무질서 공황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철수질서를 엄격히 지켜줄 것을 역설하며, 우방국인들은 국적별로 단체활동을 취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이로인해서 우리 한국인들은 200여명의 적지않은 집단이 공동체  행동을 해야하는 부담을 지게되었다. 그리고 이 집단의 현장선임지휘자인 나는, 질서유지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 큰집단을 통제해야하는 책임도 맡게 됐다.

    ◆ 철수수종작전은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4월 29일 오후 2시가 지나서야 별관지역에 있는 인원들에 대한 철수수송 작전이 시작되었다. 우선권은 미국인들에게 있었으며, 자유우방국인들은 미국인들 다음에 탑승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렸다. 미국인들은 4열종대로 줄을 섰으며, 통용문에서 시작된 줄은 수영장을 한바퀴 빙돌아서 그 길이가 120미터쯤 뒤로 연장되었으나 그래도 미국인들이 줄을 다 선것은 아니었다.  줄이 끝나는 후미에도 수백명의 미국인들이 모여 있었다.

    헬리콥터 두대가 동시에 본관마당인 탑승장에 내리면, 줄의 선두부터 통용문을 통해 본관 마당으로 걸어 들어간다. 120명이 통용문을 통과하면, 미해병대가 문을 차단하고 봉쇄한다. 기차역에 비유하면 별관지역은 역의 대합실, 통용문은 개찰구, 미해병대는 개찰원, 본관마당은 플랫폼이었다.

    철수수송작전은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밤 8시 30분이 지났는데도 우방인 차례는 오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별관에 있는 일직사령실에 가서 전화를 빌려 본관철수본부에 있는 미국대사관 베넷공사와 통화한 후, 미국통제관의 경호안내를 받으며 통용문을 통과해 본관마당을 지나 본관 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베넷공사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의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방과 방 사이의 문은 활짝 열려있고, 책상서랍은 모두 빠져있었다. 책상 위에는 손가방 하나가 놓여있고, 책상 옆에는 골프채 가방이 세워져 있었다. 베넷공사는 재콥슨 미국 예비역 대령과 함께 서있었다. 재콥슨은 주월미국대사관에 11년간 근무하고 있으며 외교관 잭책은 아따세(attache)였다.

    나는 이 철수본부에 와서 미국대사관 고위층과 밀접한 협조를 하여 한국인 철수에 만전을 기하고 있을 한국고위 외교관 두 명을 우선 만나려고 그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미 남지나해상에 가 있었다. 결국 월남에 있는 한국외교관 중에는 내가 최고선임자였다.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나는 별관에 있는 한국외교관 및 민간인 상황을 설명하고, 한국인 전원에 대한 철수 우선권을 요청했다. 베넷 공사는 묵묵히 난색을 표했고, 재콥슨 예비역 대령은 사과의 말과 함께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서 내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베넷공사는 나 혼자 대사관 본관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미 제7함대로 떠나라고 했다. 나는 지금 사이공에 남아있는 한국인 공무원 중에서 내가 제일 높은 지위의 지휘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책임상 부하들과 민간인들을 두고 아무말 없이 혼자 떠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거부했다. 철수작전은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부득이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바로 밑에 있는 선임자를 불러서 남아서 할 일을 상세히 인계해주고 떠나는 것이 원칙이며 상식이다. 설혹 떠난다하더라도 베넷공사의 권유로 즉흥적으로 받아들여 여기서 당장 헬리콥터를 타고 떠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열상 내 바로 밑에있는 이규수 참사관겸 총영사에게 내가 떠난 후의 뒷 일을 인계하고 헬리콥터를 타야한다.

    베넷공사가 냉장고에서 세븐업을 꺼내 따라주었다. 그리고 방콕에 가있는 내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부인은 베이징(北京) 출신의 중국 여인이었으며, 1939년 베이징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가서 대학 동기인 베넷공사와 결혼한 총명한 부인이었다. 우리 부부와 그들 부부는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베넷공사가 “이 공사! 지금 헬리콥터를 타지 않으면 못 돌아가게 될 것이니, 속히 옥상에 올라가서 헬리콥터를 타시오”하고 다시 권했다. 옥상의 헬리콥터 탑승장은 미국대사관 직원 및 가족, 기타 미국 공무원과 가족, 그리고 외국인 귀빈들을 탑승시키는 곳이었다.

    마틴대사가 베넷공사방에 잠깐 얼굴을 비쳐, 나는 인사를 했다. 레만공사도 잠시 나타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서성거리고 있었다. 베넷 공사방에서 약20분간 대화를 나눈 나는, 더 지체할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있는 별관으로 빨리 가서 이 상황을 알려주고 비상대책을 강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베넷공사에게 한국인들이 전원 철수할 때까지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다.

    베넷공사는 엘리베이터 있는 곳까지 따라오면서 “이공사, 지금 헬리콥터를 타시오. 모든것을 버리고 가야하오”라며 다시금 간곡하게 권했다. 재콥슨은 “이 공사님, 미안합니다. 한국인 전원에게 우선권을 줄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하고 사과했다. 내가 방에서 복도로 나가자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국통제관이 경호를 위해 내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그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귀빈은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기 때문에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별관!’이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렀다.

    본관마당에 나가니 때마침 두대의 헬리콥터가 도착하여 별관에서 통용문을 통과하여 들어오는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나는 미국대사관 옥상뿐 아니라 여기서도 물론 헬리콥터를 탈수 있는 것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탑승 광경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좌우로 무겁게 흔든 후, 본관 마당을 건너 해병들이 지키고 있는 관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나를 경호하던 미국통제관과 헤어진 후, 한국인들이 모여 있는 별장 정원 잔디밭으로 갔다. 시간은 밤 9시 40분경이었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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