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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년 만에 찾아온 복수기회, 대의(大意)를 위해 허공에 날리다
9월 6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내가 오늘 원수를 용서하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1975년에 북한이나 베트남은 모두 폐쇄된 숨 막히는 공산독재국가 체제였다. 북한에서는 신의 존재인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명령이나 지시가 없으면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으며, 또 아무일도 추진 성사시킬 수 가없다.
조선노동당통일전선부(3호청사)에서 그렇게 집요하게 나를 북한으로 납치해 가려고 베트남을 들쑤셔 움직인 것은 오로지 잔학무도한 포악성으로 악명 높은 김정일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이에 꽤 많은 협력을 해 준 공범은 당시의 베트남공산 수뇌였다. 안닝노이찡 일꾼들은 나를 다루는데 있어 김정일의 간접하수인에 불과하며, 그들의 현지 재량권이란 티끌만치도 없었다.
그렇게 볼 때 즈엉징 특은 현지의 고약한 내 원수이긴 했으나 용서할 수 없는 김정일과 같은 사탄의 부류는 아니었다. 천인공노의 대천지원수인 김정일과는 다르다. 또, 설사 그가 불공대 천지원수라 할지라도 지금의 한·베트남 우호관계를 고려할 때 나는 그에게 관용을 베풀어주어야 할 부득이한 형편에 놓여있다.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하여야 하고, 국제협력과 우호를 위해서도 힘써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이 세가지의 기본 고려요소에 따라 나는 27년 만에 만나는 원수에 대한 절호의 복수기회를 차원 높은 관점에서 물거품으로 만들어 허공에 날려 보냈다. 사생관과 국가관이 뚜렷하고, 권선징악의 판단이 빠르고 칼날 같아 일도양단(一刀兩斷)의 결심을 신속하게 내리는 인물일지라도 이런 일 만큼은 심사숙고의 긴 시간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국제 관계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내가 서울 남서로타리클럽 주회장소인 신라호텔에 메랄드룸에 도착한 것은 2002년 9월 6일 오전 7시 10분경이었다. 서울 남서로타리클럽 김도운 사무장이 이날 특별히 에메랄드룸 건너편에 준비한 VIP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30분 전에 일찍 도착한 즈엉징 특 대사와 김유복 장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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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9월 6일 신라호텔에서 만난 이대용 장군(좌)과 즈엉징 특 前 주한 베트남 대사(우)
문을 여니 특 대사가 달려와서 머리를 숙이고 내 오른손을 양손으로 붙잡으면서 “이 장군님, 참 오래간만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도 “참 오래간만에 뵙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하고 답례인사를 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이 장군님, 저는 장군님의 선경지명에 놀랐습니다. 그때 이 장군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베트남과 대한민국은 그때는 적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아주 친밀한 우방이 되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선견지명을 가진 이 장군님 이십니다.”라고 덧붙였다.
나를 치켜세우는 한편 사과의 뜻을 정중히 표시하는 말이라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1975년 그가 나를 체포 투옥한 후 신문실로 끌어내어 안닝노이찡 일꾼들이 “총살!” “총살!”하면서 위압적으로 공갈협박을 할 때, 내가 당당하게 맞서면서 했던 말을 그가 돌이키고 있는 것이었다.
월남의 티유 대통령과 함께. 당시 그들에게 내가 했던 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외교관은 자기 나라 이익을 위해 임무 수행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국제협력과 국제평화를 위해서 임무 수행하는 기능도 있어 국제 법에 의해서 완벽한 면책특권의 혜택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에도 타 국가 기관에 의해 체포될 수 없고, 전쟁당사국의 외교관이라 할지라도 본국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야 한다. 당연히 베트남도 나를 체포할 수 없으며 더구나 신문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나는 당신들의 신문에 답변할 의무가 없고, 당연히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강력히 맞섰던 것이다. 그러면서 “국제관계에 있어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면서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었다.
그때의 내 발언을 이제와서 들먹이면서 놀라운 선견지명에 감탄한다는 식의 제스처를 씀으로서 원한을 희석시키려는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이렇게 여기서 만나게되니 만감이 가슴에 오고 갑니다. 그때 대한민국과 베트남은 철천지원수의 관계에 있었으며, 특 대사는 베트남에 충성을 다하고 나는 우리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며 죽을 각오가 돼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처럼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도 대항했던 것입니다. 그때 특 대사와 나와의 사원(私怨)은 없었던 것 아닙니까? 공원(公怨)이 그렇게 험난한 상황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잡았던 손을 놓고 의자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가 되어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김유복 장군은 좋은 화해의 분위기를 더 편하게 해주느라 곁에서 간간이 덕담을 곁들어 주었다. 조선일보 C기자는 카메라 셔터를 부지런히 누르며 무언가 메모하고 있었다.
◆ 원한은 가고 평화가 왔다
특 대사는 “이제부터 우리 두 사람은 뒤는 돌아보지 말고 앞만 바라보면서 베트남과 대한민국,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힘을 합쳐나가자”고 했다. 나 역시 동감을 표했다. 약 20분에 걸친 원수의 외나무다리 극적 상봉은 끝나고 서울 남서로타리클럽의 조찬주회 개시시간이 되어서 VIP실에 있던 우리 3명은 에메랄드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시간 지속된 주회에서 연사의 시간은 30분간이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강연을 끝낸 특 대사는 주회 장소를 떠났다. 주회가 끝난 후 나는 “원한은 가고 평화가 왔다”는 생각과 더불어 “관용의 힘이 헐지 못할 장벽은 없구나”하는 심정이 들었다.
나는 김유복 장군에게 “27년 묵은 원한의 외나무다리에도 꽃은 피네.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르고, 공자님의 말씀에도 어긋나지 않고, 부처님의 법도에도 합당한 관용을 베푼 것 같아 가슴에 서려 있던 원한은 가시고 마음이 뿌듯해지는군.”하며 웃었다.
김유복 장군도 “그래, 아주 잘했어. 당연히 그래야지. 얼마나 좋은 일이야. 이 세상 사람들이 배워야 할 아주 훌륭한 일을 했어.”하면서 기뻐했다.
그 후 특 대사와 나는 여러번 만나서 식사를 함께하면서 우의를 더욱 다졌다. 그리고 내가 요청하는 일 가운데 베트남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특 대사가 열심히 나를 도와주었다. 2005년 3월, 정년을 맞아 모든 공직을 은퇴하면서 서울을 떠난 즈엉징 특 대사는 하노이에 있는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었다.
2006년 2월, 베트남에 진출하려는 나의 인척이 되는 청년기업인의 요청으로 그 일행과 함께 하노이에 갔다. 그곳에서 은퇴하여 쉬고있는 특 대사를 만났더니 아주 지성을 다하여 나와 함께간 기업인 일행을 매일같이 도와주었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며칠되지 않았는데도, 그리고 상처가 다시 악화되어 피가 흐르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나를 따라다니면서 도와주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앞으로도 내가 요청하는 일에 대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둘의 관계는 피붙이 같은 우애의 기반이 확고히 형성되었다. 앞으로 기회있을 때마다 성심성의를 다하여 서로를 돕자는 다짐을 했다.
원한이 좋은가
평화가 좋다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원한은 가고 평화가 왔다.
땅위에는 평화
사람 사이에는 착한마음지혜롭고 용감한 관용의 인(仁)이 베풀어지면 원수가 서로 만나는 외나무다리에도 향기롭고 화사한 꽃이 핀다. 그리고 서로가 힘을 합치며 도와주는 화기애애하며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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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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