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대역죄인(大逆罪人) ⑲ 

     차분하게 글을 쓰다가도 문득 석방되어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
    그럴때면 아무나 붙잡고 사정을 하고 싶다. 나를 도와주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더 초조해진다.

    그러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가 식으면서 가슴이 절망감으로 내려앉는 것이다.
    그때 나는 꼭 성경책을 집는다. 그리고는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으면 가슴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루씩 한달씩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을 아껴 열심히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감옥서의 환경은 비참했지만 빈대 이불을 덮고서도 자고 돌이 절반 섞인 밥을 먹고서도 산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공부를 했더니 감옥서 죄수 동료들이 하나둘씩 모여 처음에는 신기해했다가 나중에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위안이 되나?」
    그렇게 물은 사람은 이상재(李商在) 선생이다.
    나는 아껴주신 그분이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다. 기뻤기 때문이다.

    「양식과 같습니다.」
    먼저 그렇게 대답해놓고 내가 덧붙였다.
    「고통까지 고맙게 느껴집니다.」

    내 표현이 맞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 느낌을 전했을 뿐인데 이상재는 나에게 성경 공부를 부탁했다. 그래서 하나씩 둘씩 모인 성경공부 교인이 나중에는 40여인이 되었다.

    대부분이 정치범들로 지식인들이었으니 조선의 개신교 역사상 최초, 최대의 사건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조선 양반들 중에서 개신교를 수용한 인물이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이상재, 대제학을 지낸 이원긍, 내부협판을 지낸 유성준, 경무관 출신 김정석 등으로 개신교 신자가 되었으니 모두 주님의 역사시다.

    그 와중인 1900년 5월, 독립협회 초대회장을 지냈던 안경수(安駉壽)가 망명했던 일본에서 돌아온 즉시 한성감옥서에 수감되었다. 안경수는 갑오경장 때 군부대신(軍部大臣)을 지낸 거물이었는데 고종 폐위 음모사건을 주도했던 것이다.

    안경수는 목에 칼을 쓰고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지만 나는 창살 밖에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나는 일본놈한테도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되었네.」

    이미 소문을 들었으므로 나는 위로부터 했다.
    「대감, 기다려 보시지요. 설마 일국의 대표인 공사(公使)가 식언을 했겠습니까?」

    주한(駐韓)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林權助)가 안경수의 귀국 후 신분을 보장한다면서 꼬여냈다는 것이다. 그러자 안경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짐작은 했어. 일본 땅을 유랑하느니 조선 땅에서 죽기로 작정을 하고 돌아온 것이네.」

    그리고는 안경수가 눈을 치켜뜨고 나를 보았다. 안경수는 1853년생이니 나보다 22세 연상인 47세이다.
    「이보게, 우남. 나는 역적으로 죽네.」

    나는 눈만 껌벅였고 창살 안에서 안경수의 말이 이어졌다.
    「임금이 솔선하여 버리고 받아들였다면 조선의 개혁은 이미 절반쯤 이루어졌을 터인데...」

    내 가슴도 미어졌다.
    「대감, 기운을 내시오.」

    그때 창살 안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우남, 힘을 길러야하네. 그리고 힘을 한 곳으로 뭉치게 해야만 성공하네.」

    그러더니 안경수는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벅찬 내가 창살 밖에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해주었더니 안경수는 잠자코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