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의 보수우파에 대한 공포감, 친노세력에 늘 악용당해---

    유시민 참여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민주당의 김진표 후보와의 단일화 대결에서 승리한 이후 곧바로 민주노동당의 안동섭 후보와의 단일화에도 성공했다. 김진표 후보와는 여론조사와 국민참여 경선을 통해서, 안동섭 후보와는 별다른 단일화 절차 없이 그대로 합의했다.
    민주당은 유시민에게 패한 셈이며, 민주노동당은 유시민에게 단일후보 권리를 갖다 바친 셈이다.
    민주당의 정세균 대표는 유시민 후보로 단일화가 결정된 이후 “유후보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고, 민주노동당도 지도부 차원의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후보 단일화 결과가 발표된 직후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천안함이 어뢰에 맞은게 아니라 민주당이 어뢰에 맞았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정세균 대표와 김진표 후보는 단일화의 약속 때문에 유후보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다짐할 수밖에 없지만, 민주당의 속사정은 전혀 다르다.

    2007년 대선 직후 “진보적 가치가 숨쉴 수 없다”며 탈당 감행한 유시민

    유시민은 2007년 대선 직후 구 열린우리당이 중심이 된 대통합민주신당을 전격적으로 탈당했다. 탈당의 명분은 없었다. 단지 총선을 앞두고 친노세력과 불편한 관계인 손학규가 당 대표가 되자 이를 문제삼았다. 표면적으로라도 내세운 명분은 “현재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진보적 가치가 살아숨 쉴 수 없어 진보정당을 창당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은 2008년 총선 직전 박상천이 대표로 있던 구 민주당과 통합하여 민주당으로 당명을 개정하였다. 2003년 노무현 정권 당시 유시민이 주도하여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분당된 현재의 야권세력은 총선을 앞두고 5년만에 다시 결합한 것이다. 유시민은 바로 이 때 이탈을 했기 때문에 민주당 세력으로서는 2003년에 이어 또 다시 분열을 조장하는 인물로 낙인찍혔다.

    그뒤 유시민은 저술 활동을 해오다 지난해 노대통령의 자살 이후 강력한 노무현 바람이 불자 이병완, 이재정 등 친노세력과 결합하여 친노정당 국민참여당을 창당한다. 특히 유시민은 지난해 11월 22일 국민참여당 서울시당 창당대회에서 "행동하는 양심,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다시 만들자"면서 "제가 할 수 있으면 하고, 제가 못하면 할 수 있는 사람과 힘을 합쳐 함께 하겠다"며 대권 출마 선언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꿈과 이상이 없는 정당”, “노무현의 정신과 아무 관계없는 정당”이라 공격하며 신당의 명분을 쌓아나갔다.

    이 때문에 유시민의 참여당에 대해서는 민주당은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유시민은 시종일관 후보단일화를 중심으로 연립정부를 주장해왔지만, 민주당은 당 대 당 통합 이외에 참여당과의 후보단일화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구 민주당 출신인 김민석과 장성민 전 의원이 앞장서왔다.

    이러한 유시민의 후보단일화 전략은 2003년도에 개혁당을 통한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민주당을 사냥했을 때와는 180도 다른 전략이었다. 유시민이 2002년도 10월, 후보 지위가 흔들리던 노무현을 위해 개혁당을 창당했을 당시의 전략은 이른바 호남과 민주당 협박이었다. 유시민은 강연을 다니며 “개혁당은 호남에서 민주당에 이어 2위, 영남에서 한나라당에 이어 2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더 나아가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모든 민주당 후보를 떨어뜨릴 수 있다”며 사실 상 민주당을 협박하고 나섰다. 예를 들면 팽팽한 수도권에서 개혁당 후보가 10% 정도의 득표만 해도 전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유시민, 2003년 재보선 때도 민주당 도움으로 당선 된 뒤, 민주당에 칼 꽂아

    노무현 당선 이후 유시민은 민주당 내의 친노세력인, 신기남, 천정배, 정동영, 그리고 영남민주화 세력의 핵심인 이강철, 김두관 등과 함께 끊임없이 민주당 흔들기에 나섰다. 목표는 노무현 후보를 좌초시키려 했던 박상천, 정균환 등 구 동교동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명분이었을 뿐, 실제로는 여당 전체를 친노세력으로 재편할 정치적 계략이었다.

    2003년 4월 유시민은 개혁국민정당의 후보로 고양 덕양갑 재보선에 출마한다. 이 당시 유시민은 “절대 구태 정당인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는 없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워 개혁당 당원들의 지지를 받아내었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아 민주당의 송영길, 정동영 등은 민주당 후보를 사퇴시키며, 개혁당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한다. 개혁당의 당원들은 강력히 반발했지만 유시민은 특별히 해명하지 않고 유유히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민주당의 도움으로 당선된 유시민이 움직일 때마다 오히려 민주당이 크게 흔들렸다. 급기야 2003년 8월 민주당은 크게 요동치며, 2003년 9월, 김근태, 이해찬, 문희상, 정동영, 신기남 등 42명은 민주당을 탈당 독립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유시민은 당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개혁당을 불법적으로 해산시키고 이에 합류 결국 열린우리당 창당에 이른다.

    이들이 노린 것은 2004년 총선이었다. 유시민은 이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하며 “민주당의 이름으로는 절대 영남권에서 당선될 수 없다”는 점을 선동하였다. 노무현은 곧바로 민주당을 탈당, 민주당은 재집권 1년만에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총선 결과 유시민과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은 152석의 거대여당으로, 민주당은 9석의 미니 야당으로 판이 정리된다. 2002년 개혁당 창당 이후 채 2년도 되지 않아 유시민은 거대 여당이었던 민주당을 몰락시키며 1차 사냥에 성공했던 것이다.

    유시민의 정당 파괴행위에 나팔수 역할했던 친노좌파 언론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친노좌파 언론과 지식인들은 이미 권력을 잡은 노무현 정권에 기울어 유시민의 논리에 나팔수 역할을 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강준만 교수 등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유시민의 정당 파괴적 행태를 비판했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재합당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후보단일화와 연립정부의 깃발을 든 2010년도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유시민은, “정통지지층이 분열되면 새로운 지지층을 추가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과거 지역주의 양당구도 깨진다. 옛날 지지층에 집착하면 정치적 변화를 이끌 수 없다. 열린우리당 내에도 재통합을 주장하시는 분이 있는데 뭐가 달라지는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이어 그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정당조직면의 가장 큰 차이는 열린우리당은 당원이 당비를 내고 활동비를 스스로 부담하는 문화 정착을 위해 당헌당규를 마련하고 있는 정당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종'이 다른 식물이 됐다고 본다. 이것을 합친다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2004년 총선과 2010년 지자체 때의 유시민의 민주당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이유는 권력의 유무이다. 2004년도에는 노무현이라는 대통령 권력을 등에 업고 있어, 민주당 측과 협상할 필요없이 힘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반면 2010년도에는 권력도 없을뿐더러, 의석수 하나 없는 참여당 간판 하나로 민주당을 장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유시민은 민주당을 비판은 하되, 후보단일화의 틀은 깨지 않을 정도로 그 존재는 인정하는 전략을 택한다.

    반면 참여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민주당이 참여당과 단일화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백낙청 등 시민단체 인사들의 압박 탓이었다. 이른바 5+4라 불리는 범 야권 5개 정당과 4개의 시민단체들의 후보단일화 협상 테이블에 의석 하나 없는 참여당은 당당히 주인으로 초대받았다. 4개의 시민단체 중에는 이해찬 전 총리의 시민주권도 포함되어있었다. 친노세력을 대표하는 전직 총리가 시민단체 인사로 참여했으니, 이 기구가 무엇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백낙청, 백승헌 변호사 등 친노좌파 측의 시민단체 인사들 중 그 누구도 이해찬 전 총리의 조직이 참여하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시민단체들은 친노세력의 부활을 위해 조직된 사실 상 유사정당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찌감치 테이블을 박차고 나온 진보신당의 노회찬, 심상정 등이 이해찬 전 총리의 참여를 비판했다.

    이해찬, 시민운동가로 잠시 변신하여, 참여당 5+4 테이블에 참여시켜

    그러나 야권의 대표주자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갖고 있던 민주당으로서는 이 테이블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민주당은 참여당과 함께 협상 테이블에 나서면서 어쩔 수 없이 참여당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평민당의 김경재 전남도지사 후보는 “처음부터 한명숙, 안희정 등 친노세력의 일부는 민주당을 장악하고, 유시민 등 주력부대는 참여당을 창당하고, 이해찬은 시민단체로 위장하여 민주당을 접수한다는 게획을 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권력이 없이도, 각자의 포지션에서 최대의 역할을 하여 의석 하나 없이 민주당 사냥을 신속하게 해치웠던 것이다.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이해찬은 유유히 친노 한명숙의 서울시 선대위원장으로 정계복귀(?)를 하게 된다.

    그러나 유시민의 단일후보 선정 이전부터 이미 광역단체 다수를 친노세력이 차츰차츰 장악해가고 있었다. 친노세력의 행동대장인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이 경선없이 충남지사로 공천된 것을 비롯, 한명숙이 서울시장 후보로 사실 상 내정, 강원도지사의 이광재, 경북도지사 유성찬, 대구시장 김충환, 부산시장 김정길, 광주시장에 참여당의 정찬용까지 모두 9명이 친노인사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 출신의 제주지사 후보 고희범까지 포함하면 10명이며,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활동을 시작한 충북지사 이시종,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인 인천시장의 송영길 후보까지 합치면 13명,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구 민주당에서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탈당을 해버린 박준영 전남지사까지 합치면 14명이다. 이 뿐 아니라 역시 대선을 앞두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와중에 “다음정부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계승하는 정치체제가 집권하는 것이 역사의 대의에 맞는 일"이라며 해체 직전의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강운태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까지 포함하면 15명이다. 즉 광주시장의 경우 친노직계인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과, 몰락한 친노세력을 살리러 들어간 강운태 등 두 명의 친노인사가 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보건데, 이미 참여당과 민주당의 지도부 사이에서의 차이는 없으며, 친노세력이 민주당을 장악한 뒤, 그 길을 따라 유시민의 참여당 친노세력이 무혈입성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이다. 유시민은 화룡정점을 찍으며, 친노세력의 민주당 사냥이 끝났음을 대외적으로 공표했을 뿐이다.

    대선 이후 완전히 몰락할 것으로 보였던 친노세력이 이토록 빠른 시간에 부활한 데에는 노대통령의 자살 이후 불었던 노무현 바람의 덕이 컸다. 이 흐름을 통해 유시민 등의 친노세력은 참여당을 민주당 옆에 만들어 민주당 내의 친노세력과 함께 협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3년도와 2010년도에 유시민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민주당 사냥에 성공한 공통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영남 민주화세력의 호남 협박이다.

    호남 내치려던 유시민, 친노세력의 권력만 쫓아간 호남

    2003년 열린우리당 분당 때부터 호남과 친노세력은 이상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비극은 호남 기반의 정당인 민주당에서 영남민주화 세력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서 비롯되었다. 민주당의 호남세력들은 “지역감정을 허문 호남인들의 승리”라 자축했지만, 노대통령은 “호남인들이 내가 좋아서 찍었는가. 이회창이 미워서 나를 택한 것”이라며 호남을 폄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친노세력의 호남 비하는 당선 직후 열린우리당 분당을 시작하면서 극에 달했다. 유시민의 신당 창당 전략대로 호남의 지지를 덜 받아야 영남에서 승부를 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당 분당으로 호남의 정서가 어수선할 때, 호남출신이지만 친노세력의 선봉대였던 신기남은 “호남이 더 흔들려야 한다. 그래야 영남의 표가 나온다”며 더욱 더 호남을 자극했다.

    이렇게 열린우리당 창당을 시작했지만, 친노세력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호남의 정치인, 호남의 지식인들이 떨어져 나가줘야 했는데, 끝까지 친노세력을 따라와서 열린우리당도 호남기반의 정당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열린우리당은 총선 결과 영남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한 반면, 호남에서는 과거 민주당과 똑같이 압승했다. 물론 2004년 총선 이후 지자체 선거와 재보선에서 구 민주당에 연패했으나, 결국 DJ가 개입하여 열린우리당이 구 민주당과 합당했기 때문에 결과는 똑같았다. 유시민과 친노세력의 정치실험은 실패했고, 돌고 돌고 돌아 다시 도로 민주당으로 회귀한 것이다.
    유시민이 2007년 대선 이후 탈당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정치실험의 실패를 자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소속으로 대구에 출마하여 “수도권 규제를 철폐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기도 했다. 오직 표만을 위해 내세운 대구에서의 공약이 반대로 수도권인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는 발목이 잡힌 셈이다.

    2010년의 친노세력은 호남세력을 내치려는 전략을 자제하고, 호남기반의 상층부를 장악하는 우회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2003년도에는 틈 나는 대로 호남 전체를 모욕하는 발언을 퍼부었던 유시민도 참여당 창당 이후에는 극도로 입을 조심해왔다. 이번 지자체 선거를 범 야권 전체가 반MB연대로 끌고 간 점도 지역성을 감추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친노세력이 아닌 호남의 입장에서 보면 본질은 역시 똑같다. 2004년 총선 당시 호남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모두 노무현의 권력을 추종하며 따라갔고, 선거 결과도 그렇게 나왔듯이, 이번 2010년도의 지자체 선거 역시 호남의 표심은 한나라당을 이겨서 승리를 안겨줄 세력에게 쏠릴 것이라고, 유시민 등 친노세력은 믿고 있는 것이다.

    2004년에는 이미 대권을 잡고 있었던 상황에서 호남을 떨궈내면서 영남을 잡아보려는 정치실험을 했던 반면, 현재는 일단 보수우파 세력과 대선에서 일전을 벌일 수 있도록 전력을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에 지역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유시민이 민주당을 그토록 저주했으면서도 후보단일화를 위해 손을 잡은 이유도, 어쨌든 민주당의 기반인 호남세력은 승리할 수 있는 자라면 자신들을 배신하고 사냥했던 자에게라도 얼마든지 표를 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실제로 민주당과 참여당 광역 후보 전원이 친노세력으로 채워진 것도, 여전히 민주당의 호남세력이 이러한 기생형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호남의 기생형 패권주의가 유시민의 민주당 사냥 성공의 본질적 원인

    이러한 호남의 기생형 패권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경우라도 친노세력은 민주당 호남세력과의 싸움에서 백전백승을 할 수밖에 없다. 오차피 호남은 이길 수 있는 자에게 표를 몰아준다는 것이 게임의 법칙이라면, 호남 이외의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선동할 수 있는 친노세력이 이른바 호남 난닝구세력에 비해 상대적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유시민과 친노세력이 호남을 언제든지 꺼내 써먹을 수 있는 잔돈 취급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호남이 보수우파 세력에 갖고 있는 역사적 공포 때문이다. 그 어떤 경우라도 호남이 보수우파 세력을 지지할 수 없을 거라는 약점을 유시민과 친노세력은 시기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활용하여 패권을 잡아왔다. 이는 지자체 선거의 최대 쟁점인 4대강 정책에 대해서도 드러난다. 영산강 개발은 현 정부의 4대강 개발 이전에 수립되었던 민주당의 공약 사항이자 호남인의 숙원임에도 단지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다는 이유로 친노세력은 이를 반대할 것을 강요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친노세력을 결국 지지할 것이라는 그 확신, 혹은 전설을 깨지 않는 한 친노세력의 민주당 장악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역 구도와 유시민의 행적으로 볼 때, 이번 지자체 선거를 전후하여 호남 떨구기 전략이 구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시민과 노무현이 집권 기간 동안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추진했던 반면, 호남 기반의 민주당과의 합당에는 끝까지 반대했던 것이 좋은 증거가 된다.

    유시민은 정책적으로만 볼 때 좌파가 아니다. 한미FTA를 찬성했고, 현재에도 무상급식을 반대하고 있다. 유시민은 단지 별다른 이유없이 보수우파 세력과 지엽적인 사안으로 충돌하면서 경쟁력 우위를 내세워, 호남과 진보신당 지지층을 흡수하여 야권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할 뿐이다.

    호남차별주의와 민주당 분당에 대해서 일체의 반성과 사과하지 않은 유시민

    유시민과 친노세력은 공공연히 “영남의 1석이 호남의 10석보다 낫다”고 공언해왔다. 유시민은 크고 작은 자신의 실책에 대해 반성을 해왔음에도, 이러한 사실 상의 호남차별주의에 대해서는 일체의 반성을 한 바 없다. 또한 개혁당의 해체에 대해서는 사과했으나, 호남인들을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은 민주당 분당에 대해서도 반성한 바 없다. 이는 유시민의 확고한 세계관이자 정치관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재개할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시민의 전략을 미리 간파하고 독자세력을 형성한 야권세력은 노회찬, 심상정의 진보신당과, 한화갑, 김경재의 평민당이다. 그러나 기생형 패권주의에 빠진 호남, 그리고 이미 권력의 단맛을 잊지 못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 친노좌파 시민사회와 언론의 그림자 밑에서 진보신당과 평민당이 세를 형성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진보신당은 정통좌파 노선인 반면 평민당은 중도우파 노선이다. 유시민과 친노세력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도도 아니고 오직 영남민주화세력의 패권만을 노리는 세력이다. 노선만으로 보자면 유시민과친노세력을 진보신당과 평민당이 좌우에서 포위하고 있는 셈이다. 유시민과 친노세력이 탁월한 전략으로 민주당과 호남을 포위해서 사냥에 성공한 사이, 자신들도 모르게 오히려 친노세력이 포위되어버린 것이다.

    선거 전후로 유시민이 심판받으면, 친노좌파 언론과 시민사회도 무너질 것

    문제는 유시민과 친노세력의 나팔수 노릇을 하며 오직 권력만을 노리는 친노좌파 언론과 시민사회이다. 이들이 언로를 장악하고 있는 한 패권세력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신들의 노선을 회복하려는 진보신당과 평민당이 길을 터나갈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번 지자체선거를 전후로 유시민과 친노세력이 심판을 받게 되면 친노좌파 언론과 시민사회까지 재편되며 그토록 꽉 막혀보이던 퇴행적 민주화세력의 패권주의도 무너질 수 있다. 이번 지자체 선거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