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朴正熙 傳記(全13권) 작업을 일단 끝낸 뒤 아들 志晩씨를 만났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신 분이셨어요. 나무 꽃 강아지를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버지를 쓴 글이 없더군요."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한 면을 지적한 것이다. 朴正熙 死去 30주년에 즈음하여 13권의 傳記 가운데 특히 드라마틱한 부분을 뽑아 이 책을 만들면서 새삼 志晩씨의 충고가 이 분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山林녹화에 성공한 것은 의무감에서라기보다는 숲과 나무를 사랑한 결과일 것이다. 그가 富國强兵에 성공한 것은 못 살고 힘없는 사람들을 사랑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日記엔 낙엽, 꽃, 나무, 구름 등에 대한 감상적 표현들이 아주 많다. 작은 것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이 느껴진다. 그의 일기는 권력자의 日記가 아니라 소학생의 日記처럼 순수하다. 너무 꾸밈이 없어 "대통령이란 분의 일기에 깊은 맛이 없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당시 朴대통령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 보니 절대적 권력을 잡고도 초등학생과 같은 순수한 정신을 유지하였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순진함은 物情을 모를 때의 마음상태이고 순수한 것은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겪고 나서도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 淸濁(청탁)을 다 들여 마시되 맑은 魂을 유지하는 자세이다.

    朴대통령이 1973년 7월3일 경주 불국사 復原 준공식에 참석하여 내린 지시문엔 이런 대목이 있다. 

     <불국사 주차장의 1~2호 변소 뒤편에 벚꽃나무를 植栽(식재)하여 미화할 것. ‘화랑의 집’ 뒤편 남산에 自生하고 있는 꼬불꼬불하고 클 수 없는 잡목은 제거하고 적합한 樹種(수종)으로 대체할 것>

     사람들은 “대통령이 화장실 주변에 나무 심는 것까지 간섭해야 하는가”라고 의아해 할 수 있다. 朴 대통령은 자동차로 지방을 다니면서 창밖을 살펴보다가 가끔 수행원에게 “저기 좋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누가 베었어?”라고 묻기도 하였다. 한국의 山野를 자신의 캔버스라고 생각하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1975년 8월27일, 대통령은 이발을 하고 나서 기자실에 들렀는데, 한 기자가 “산림녹화의 비방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무도 사람과 같이 생각해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산에 가보면 알겠지만, 나무도 사람이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등산로 근처의 나무들은 시들거나 축 늘어져 있는 데 반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는 나무들은 싱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삼성의 이병철 씨가 용인공원을 만들기 전에 산림에 관계되는 대학 교수들을 만나 산림녹화 방법을 물어봤는데, 그때 어떤 교수가 아무런 수식사도 없이 ‘入山금지를 시키면 됩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병철씨는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답니다. 뒤에 이병철씨가 일본에 가서 총독부 시절 산림에 관한 일을 한 관리를 만나보았는데, 그 사람도 같은 얘기를 했답니다.”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제4호에 실린 5학년생 朴正熙(당시 19세)의 ‘大自然’이란 제목의 詩.

     <1.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황야의 한 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大地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이상>

     


    작고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애정

     


     朴正熙는 視覺的(시각적)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건설한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엄청난 重量感을 가진 조선소와 제철소로 상징된다. 한반도에서 일찍이 보지 못하였던 스케일 감각이었다. 朴正熙와 鄭周永의 합작품인 울산 공업단지는 작년 780억 달러의 수출을 올려 세계최대의 공업도시로 팽창하였다. 이런 거창한 사업 뒤에 숨은 들꽃, 농부 등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朴正熙의 眞面目일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였다는 朴正熙가 가장 사랑한 것은 한국사람, 특히 가난하고 어렵고 약한 사람들이었다. 흔히 그를 평하여 ‘자신의 恨을 민족의 恨으로 여기고 한풀이를 하는 과정에서 나라를 발전시킨 사람이다’고 하는데, 민족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였다는 이야기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1951년 朴正熙가 9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할 때 북한군의 포격과 기습으로 하루 평균 서른 명꼴로 戰死者가 발생했다. 어느 날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사단장에게 올린 작전참모가 “오늘은 좋은 날이니 회식을 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김종갑 사단장은 박정희를 불러 준비를 시켰더니 그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 명도 안 죽었다면 모르지만 두 명밖에 안 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합니다. 그 두 사람의 부모는 아마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도 더 슬플 겁니다.”

     1963년 그가 ‘국가와 혁명과 나’를 朴相吉씨에게 구술, 代筆시킬 때의 일이다. 어느 날 朴 의장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이것을 좀 넣어줄 수 없습니까”라고 어색하게 말하더라고 한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그는 이런 ‘서민적 반골정신’을 권력자가 되고나서도 죽을 때까지 유지한 사람이었다. 朴대통령은 1972년 연두 순시 때 노동청을 방문,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에 구로동 어느 수출 공단에 갔을 때입니다. 아주 정밀한 기계를 취급하는 職工(직공)인데, 그 작은 것을 들여다보고 작업하기 때문에 視力이 대단히 피로하기 쉽고 또 어두우면 아주 작업에 지장이 많고, 가보니 저쪽 구석에서 컴컴한 거기서 일하는데 불은 여기서 거꾸로 뒤로 비치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 가서 지적을 했지만, 책임자가 다니다가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한테는 電氣를 하나 따로 더 달아 준다든지 조명을 더 밝게 해준다든지 이런 것은 간단한 착안입니다.”

     


     朴正熙는 가장 작은 郡을 방문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이던 1962년 10월 해군배로 울릉도를 찾았다. 그는 위험한 고비를 두 번 넘겼다. 도동 항구에서 작은 경비정을 타고 먼 바다에 떠 있는 本船으로 떠나려고 할 때 풍랑이 일었다. 경비정은 흔들리다가 전복될 뻔했다. 위기를 감지한 해군 참모총장이 “바다로 뛰어내리자”고 했다. 그때 풍랑은 더욱 거세어져 배를 해안에서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전송 나왔던 島民(도민)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밧줄을 던져 겨우 경비정을 해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다. 해안 가까이 갔을 때 朴 의장을 비롯한 乘船者(승선자)들이 한 사람씩 바다로 첨벙 첨벙 뛰어내렸다. 다행히 水深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았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朴 의장 일행은 산을 넘어 건너편 학동 항구로 갔다. 그쪽 바다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학동 항구에서 경비정을 타고 본선에 다다랐을 때 또다시 풍랑이 거세게 일었다. 朴 의장은 밧줄로 묶어 만든 줄사다리를 타고 本船에 오르는데 파도가 덮쳤다. 朴 의장은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미친 듯이 출렁이는 바다 속으로 떨어질 뻔했다. 동행하였던 동아일보 李萬燮 기자(국회의장 역임)는 “만약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의 신변에 어떤 일이 발생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도 그날의 파도만큼이나 심하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朴 의장은 “이래서 국가 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야”라고 했다.


     “가난은 나의 스승이고 은인이다.”

     


     작고 낮은 곳에 대한 그의 관심은 겸손하고 소박한 인간성의 반영이었다. 아들 志晩씨에게서 들은 이야기.

     "아버지는 가끔 술을 많이 드시고 내 침대로 쳐들어와서 주무시기도 했습니다. 過飮(과음)을 하셔서 내 침대에 토해놓으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에 나를 불러 '지만아, 어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하시는 거에요."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로 일하였던 분의 증언도 비슷하다. 朴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자주 회식을 했다고 한다. 한번은 야당 총재에 대하여 좀 과격한 말을 했는데 그 다음 번에 회식을 할 때 대통령이 갑자기 기자들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절을 하면서 '내가 그때는 과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한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號(호)가 없었다. 고령 朴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이 보고를 받은 그는 "박정희란 이름 석 자로 충분하다"고 거절하였다. 한 보좌관이 모 외국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 朴 대통령은 "박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하였다. 朴 대통령은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박사 학위가 하나도 없다.

     朴 대통령은 私信을 쓸 때는 절대로 '大統領 朴正熙'라고 하지 않았다. '朴正熙 拜'라고만 했다.

     朴 대통령은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그의 생일은 호적에 잘못 적혔다. 그날을 생일이라고 생각한 장관들이 축하 인사를 해도 그냥 받아주었다. 

     호, 명예박사,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던 朴 대통령은 권위적인 것들을 생래적으로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한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로 불린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횡포를 미워하였다. 그는 虛禮虛飾(허례허식)도 싫어하였다. 항상 淸貧한 마음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한 분이었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을 꽂고, 헤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屍身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恩人이다>면서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恩人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라고 썼다. 자신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 君臨(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뒷모습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김재규로부터 가슴에 최초의 한 발을 맞았을 때 대통령의 왼편에 앉아 있던 가수 심수봉은 자신 쪽으로 쓰러진 그를 부축하여 앉히면서 비명을 질렀다. 오른 편에 있던 신재순 여인이 일어나 심수봉 쪽으로 가서 대통령의 등에 손을 댔다. 뜨거운 게 물컹 잡혔다. 피였다. 한 차례 총성이 멎자 실내 화장실로 피했던 경호실장 車智澈이 문을 빼꼼히 열고 머리만 내밀고는 “각하, 괜찮습니까?”라고 물었다. 신재순이 보니 총 맞은 차지철의 오른 손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난 괜찮아.”

     대통령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심수봉이 앉았던 방석이 대통령의 流血(유혈)로 적셔졌다. 申양은 손수건 같은 것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피가 솟고 있는 대통령의 등에 손을 꼭 댔다. 신재순의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박정희의 숨소리는 “크르렁, 크르렁” 하고 있었다.

     “각하, 정말 괜찮습니까?”

     申양이 물었다.

     “응, 나는 괜찮아`…….”

     申씨는, “나는 괜찮아”라는 生前 마지막 말의 뉘앙스가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여기를 빨리 피하라’는 뜻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50년 戰時 부산에서 맞선을 보던 날 陸英修는 朴正熙 소령의 뒷모습을 먼저 보았다고 한다.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으로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에요.”

     궁정동 安家에서 朴正熙가 보여 준 최후의 모습이 바로 그의 뒷모습일 것이다. 가난과 亡國과 戰亂(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 깊이 뭉쳐 두었던 恨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사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하여서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총탄에 가슴을 뚫리고도 ‘체념한 듯 담담하게(신재순 증언)’ 최후를 맞은 이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 혁명가 朴正熙였다.


     이 책은 2006년에 나온 朴正熙 傳記 13권(조갑제닷컴)에서 뽑은 62개의 장면들을 모은 것이다. 주로 그의 인간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選定하였다. 朴正熙 死去 30주년을 맞은 2009년 초에 출판사 ‘기파랑’의 安秉勳 사장께서 그런 출판 아이디어를 제시하셨다. 安 사장은 조선일보 在職(재직) 시절 필자에게 朴正熙 전기를 신문에 매일 연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朴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安 사장은 지금은 유명한 말이 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근대화 혁명가의 말년 獨白을 필자에게 전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
                                                                                        
    (새책 '박정희의 알려지지 않은 진면목' 머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