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4월 방영되었던 MBC 드라마 ‘불새’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막장이다. 부자집 딸과 가난한 집의 자수성가한 남자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다. 그러나 생활 습관의 차이와 가족들의 여전한 반대로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다 결국 이혼한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가 죽으면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여자는 결국 가정일을 돕는 헬퍼로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게 된다. 남자는 승승장구, 서진그룹이라는 대형 회사의 CEO가 된다. 그 여자는 남자의 가정 헬퍼로 들어가고, 서진그룹의 후계자와 3각구도가 형성된다. 이러한 전형적인 막장 드라마가 대한민국 드라마 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승화된다. 대체 어디서부터 막장이며 어디서부터 드라마 예술인가?

    ‘불새’의 남자 주인공 장세훈 역은 이서진, 여자 주인공 이지은역은 이은주, 서진그룹의 후계자 서정민 역은 에릭, 장세훈의 두 번째 애인 윤미란 역은 정혜영이었다. 이들 네 명은 드라마 내내 얽히고 섥히며 그야말로 드라마다운 로맨스를 그려나간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우연과 필연이 뒤섞이는 막장 중의 막장 드라마이지만 ‘불새’가 방영될 당시 이러한 드라마 구조를 비판하는 의견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바로 우연으로 범벅되어있지만 그 우연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을 매우 디테일한 드라마 장치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부잣집 딸과 가난한 자수성가형 남자가 결혼하고, 이에 가족들이 반대한다는 설정은 너무나 식상한 테마이다. 그러나 ‘불새’에서는 왜 여자의 아버지가 비정상적으로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는지 이유를 설명한다. 여자의 아버지가 바로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던 것이다. “나는 온갖 열등감에 빠져있는 너 같은 놈을 잘 알아”라 일갈하는 아버지는 바로 장세훈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장세훈 캐릭터와 이은주의 미모와 연기가 드라마의 힘

    또한 ‘불새’의 우연의 구조를 필연으로 바꿔낼 수 있던 힘은 장세훈이라는 캐릭터였다. ‘불새’의 작가들은 장세훈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로서 “아 저럴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여자의 집에서 아파트를 사주었을 때 도발하는 그의 모습, 자수성가형 회사 CEO로서의 냉정한 모습 등등은 실제 자수성가형의 인물의 캐릭터를 그대로 재현하였다. 물론 이는 이서진의 연기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진그룹의 후계자 서정민의 캐릭터 역시 완벽했다. 일반적으로 드라마에서의 재벌 2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오만하거나 멋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서정민은 일과 여자에만 빠져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상처투성이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면서도 재벌가에서 자란 자존심을 잃지 않고, 가정에서의 불행을 이지은이라는 여자로 인해 보상받으려 한다. 서정민의 불완전한 캐릭터는 젊은 여성팬의 동정과 연민을 자아냈다.

    물론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이은주가 연기한 이지은역이다. 부잣집 딸로 철없이 컷지만 가세의 몰락 이후, 가정을 책임지는 성숙하고 차분한 여성으로 갑자기 변모한다. ‘불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다보면 갑자기 바뀐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현실적 설정은 이은주의 깨질 듯한 아름다움으로 극복된다. 중반부터 후반까지 이은주는 시종일관 우는 연기를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장세훈의 헬퍼로 들어가서 시종일관 긴장된 상황을 맞게 되고, 자신을 좋아하는 후계자 서정민과의 삼각 갈등으로 이지은은 편한 날이 없다. 그녀에게는 일상 자체가 불행이며, 이를 눈물로 버티게 되는데, 이은주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캐릭터가 공감을 얻었을지 의문일 정도로 그의 미모와 연기는 완벽했다.

    특히 이혼녀라는 이유만으로 서정민의 집안에서 “달라붙지 마, 쓰레기같은 게”라는 모욕적 언사를 당한 뒤, 장세훈을 불러 “다 자업자득이야. 당신은 우리 집에서 물벼락 맞고 재떨이 맞고 그랬지”라며 포장마차 바닥에서 흐느끼는 모습, 노래방에서 ‘그리움만 쌓이네’를 부르며 주저앉아 우는 모습, 다른 연기자였더라면 아마도 짜증의 연속이었을 테니지만, 이은주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은주는 결국 불행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불새’는 이은주에게 드라마 유작으로 남게 된다.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한다는 통념에 비추어볼 때, ‘불새’에서의 이은주의 모습은 가장 아름다웠다.

    ‘불새’는 할리퀸 로맨스 ‘그에게 맞지 않는 여자’가 원작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스토리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철저히 한국적으로 변환시켰다. 또한 이승철이 부른 ‘불새’의 주제가 ‘인연’ 역시 드라마의 곳곳에 배치되며 극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불새’의 이은주, 지금도 살아있었더라면

    이들 이외에도 장세훈의 두 번째 여자 윤미란 역을 맡은 정혜영의 악녀 연기도 화제였다. 물론 악녀 역시 지금의 막장 드라마의 막장 악녀와는 전혀 달랐다. 정혜영의 정신병적 사랑, 그리고 장세훈과 이지은 간의 운명적 사랑 앞에서 좌절하며 결국은 자살에 이르는 캐릭터는 여성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정말 남자를 병적으로 사랑하면 충분히 저럴 수 있다는 공감대 말이다.

    드라마 곳곳에 배치한 사물 장치 등도 매우 섬세했다. 애초에 장세훈과 이지은의 만남의 매개체인 아라비아의 상상의 새 ‘불새’ 그림은 드라마 내내 장세훈의 집에서 보여진다. 장세훈이 ‘불새’ 그림을 그대로 갖고 있는 한 언젠가는 이 둘이 재회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했던 것이다.

    ‘불새’는 결국 서진그룹의 회장이 이지은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으로 밝혀지면서, 이지은과 서정민의 관계가 깨지고 그 이후 장세훈과 재회하면서 끝을 맺게 된다. 드라마 방영 내내 시청자들은 결국 이지은과 장세훈이 다시 재결합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고대 비극의 플롯을 따왔으면서도 이러한 시청자들의 바람 때문인지 ‘불새’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불새’는 지금은 역시 이은주의 드라마 유작으로 기억된다. 이은주는 ‘불새’ 이후 영화 ‘주홍글씨’를 마지막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주홍글씨’가 한석규 중심의 영화였기 때문에 이은주의 팬들은 ‘불새’를 이은주의 유작으로 받아들인다. 이은주는 ‘불새’에서 철없는 부잣집 딸과, 가정을 이끄는 꿋꿋한 여성이라는 사실 상의 일인이역을 감당해냈다. 만약 이은주가 살아있었더라면 그가 얼마나 더 훌륭한 작품들에 참여했을지, 영화계와 연예게에서는 지금도 안타까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