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나 왔어.”

    아들은 저만치에서 어두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비군복 차림이었다. 아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갔다.

    하지만 아들은 자꾸 뒷걸음질 쳤다.

    “왜 그러고 있어? 어서 집으로 와.”
    “엄마, 나는 못 가.”
    “왜? 왜 못 오는데?”

  • ▲ 고 박동혁 병장 ⓒ 뉴데일리
    ▲ 고 박동혁 병장 ⓒ 뉴데일리

    2002년 9월 20일 꿈결처럼 아들은 떠났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였다.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었다. 자기 일 자기가 알아서 하고 인사성도 밝아 동네 어른들 모두 좋아했다. 해군 의무병에 지원했을 때도 걱정하는 엄마에게 “의무병은 배 안 타요”라고 안심시키던 아들이었다.

    추석 다음날 화장(火葬)을 했다. 유골 상자와 함께 작은 상자가 전해졌다.

    “고인의 몸에서 나온 쇠붙이입니다.”

    상자 안에는 아들의 전신을 찢고 할퀸 총탄이며 포탄 조각들이 담겨있었다.

    “쇳조각이 이렇게 많이 나온 것은 처음 봅니다. 3㎏이나 나왔어요. 3㎏.”

    그 한 마디가 애써 추스르던 마음을 산산조각 찢어놓았다.

    ‘불쌍한 우리 아들, 얼마나 아팠니?’

  • ▲ 고 박동혁 병장의 부모 박남준 이경진씨. ⓒ 뉴데일리
    ▲ 고 박동혁 병장의 부모 박남준 이경진씨. ⓒ 뉴데일리

    7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 참수리 357정 의무병으로 참전했다 중상을 입고 결국 전사한 고 박동혁 병장의 부모 박남준-이경진 부부.

    이들에게 아들은 책상 위의 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장례 뒤 주위의 시선도 동정도 다 싫었다. 그래서 컨테이너 하나 끌고 강원도로 왔다.

    아무 연고도 없다. 그래서 차라리 더 편했다. 홍천군 동면 속초 2리. 컨테이너 일부는 방으로 꾸미고 나머지 공간에 소 다섯 마리, 고양이 한 마리 키우고 산다.

    “기자들 절대 안 만나는데…. 한번 다녀가면 제가 한 달을 아파야 해요. 7년이 지난 지금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거든요.”

    어머니 이경진씨는 벌써부터 눈시울이 촉촉해있다.

    “애 아빠 사우디에 가있는 동안 혼자 낳아서 4년을 키웠어요. 정말 애지중지 키운 아인데….”

    애끓는 모정이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한다.

    “자기 의무를 다하고 갔으니까 마음 편해요. 동혁이가 의무병이었잖아요. 부상한 동료들을 제대로 못 살리고 자기가 살아남았다면 그 아이 성격에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그날 아침, 북한 684함이 참수리 357정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던 10여 분, 박동혁은 피격당한 윤영하 정장과 이희완 부정장 등을 돌보느라 정신차릴 틈이 없었다. 22포로 다가갔을 때 얼굴의 3분의 1이 없어진 황도현 하사가 보였다. 죽어서도 방아쇠를 놓지 않은 모습이었다.

    황 하사를 밖으로 끌어내는 순간 적탄 하나가 박동혁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허벅지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그때 다시 적의 포탄 하나가 옆에서 터졌다.

    박동혁은 겨우 몸을 지탱하고 62포로 기어가 방아쇠를 당겼다. 적함으로 탄환이 날아갔다. 또 다시 적탄이 오른 팔을 때렸다. 너덜너덜한 오른 팔을 간신히 움직이며 사격을 계속했다. 62포 포신이 빨갛게 달궈졌다.갈수록 혼미해지는 정신을 애써 추스르는 순간 '파파팍' 적탄이 온몸을 꿰뚫었다. 온몸이 누더기처럼 찢겼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국군수도병원 병상에서 만난 동혁이는 처참했다. 베드를 둘러싼 링거 병이 22개. 병원에서 빼낸 포탄 파편만 100여 개였다. 그렇게 84일을 보냈다.

  • ▲ 고 박동혁 병장의 몸에서 나온 파편들 ⓒ 뉴데일리
    ▲ 고 박동혁 병장의 몸에서 나온 파편들 ⓒ 뉴데일리

    “그 84일이 마치 80년 같았어요.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데 부모로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한스럽더라고요.”

    장준봉 주치의에게 ‘대장 이식이라도 해주겠다’고 했다. 파편으로 인한 장 출혈이 너무 심해 동혁이 고생을 하던 터였다. “안된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그렇게 성심성의껏 치료해주던 주치의가 미워지더라고 이경진씨는 말했다.

    자식 앞세운 부모 마음은 숱검정이 된다. 까맣게 타들어간 가슴을 정부는, 사회는 끝없이 건드리고 자극했다.

    “무슨 말이라도 할까 두려웠는지 참 우리들을 많이 괴롭혔어요.”

    수사기관에선 미행에 도청에, 정기적으로 찾아와 근황을 묻고 갔다.

    “우리가 뭐 자수한 남파간첩도 아니지 않습니까?”

    2남 중 둘째 동민이는 해군 군무원으로 일한다. 아들 둘을 모두 조국의 바다에 바쳤다. 동민이가 그 시험에 당당히 붙었을 때도 기관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빽’으로 붙었느냐”고.

    이쯤 되면 이건 나라가 아니다. 적과 싸워 목숨 잃은 것이 죄가 되는 나라가 이 지구에 있단 말인가. 차마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어 이 산골까지 왔다고 동혁의 아버지 박남준씨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박씨는 1957년생 닭띠. 스물 다섯에 본 첫 아들 동혁이도 1981년생 닭띠다.

    그에게도 동혁인 친구 같은 아들이었다. 일터에서 귀가하다 사거리에서 만나면 다정하게 어깨 기대고 돌아오던. 성격이 차분해 전공인 치기공학 공부를 마치면 제몫 다할 믿음직한 ‘친구’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NLL 만큼은 우리가 사수해야 합니다.”

    아들의 목숨으로 지킨 바다를 꼭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때 그 NLL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대통령을 가졌었다. 적이 NLL을 침범해도 바라만보고 있으라는 대통령을 가졌었다. 그리고 지금은?

    “크게 달라진 것 없습니다. 저희 부부나 다른 유족들이 보상금 더 달라는 것도 아니에요.(동혁이 유족에게 주어진 국가보상금은 3150만원이었다) 조국을 지키다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서의 명예를 지켜달라는 겁니다.” 

    뭐라고 말도 안했는데 해전 직후 이들에게 제안된 약속은 달콤했다. 교과서에 실어 숭고한 희생을 기리겠다든지, 훈장도 격을 높이겠다든지. 하지만 무엇 하나 이뤄진 것은 없다. 이것은 또 다른 배신이다.

  • ▲ 참수리 357호 ⓒ 뉴데일리
    ▲ 참수리 357호 ⓒ 뉴데일리

    2차 연평해전 뒤 아무도 참수리 357호의 영령들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들을 위해 추모의 촛불을 든 사람이 있던가. 김선일을 위해, 미선이와 효순이를 위해 들었던 그 수많은 촛불 중 그 몇 개도 이들을 위해 들려진 적은 없었다. 이것이 첫 번째 배신이다.

    그리고 2007년 10월 11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NLL을 영토선이라고 하는 것은 국민을 오도하는 것”이라며 “헌법상 북한 땅도 영토인데 영토 안에 줄을 그어놓고 영토선이라고 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국군통수권자가 병사들이 생명까지 바쳐가며 지켜온 NLL을 허무는 발언이었다. 이것이 두 번째 배신이었다.

  • ▲ 고 박동혁 병장의 흉상 ⓒ 뉴데일리
    ▲ 고 박동혁 병장의 흉상 ⓒ 뉴데일리

    그리고 지난해 10월13일 군대 폐지를 주장하며 국군의 날 누드시위를 벌였던 강의석(서울대 법대)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서해교전 전사자는 개죽음을 당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누군가 그들의 죽음이 ‘개죽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은 아무 보람 없이 죽었다, 즉 개죽음 당했다고 말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이것은 세 번째 배신이었다. 

    김치찌개에 소주 곁들인 점심 자리에서도 동혁이 어머니 이경진씨는 계속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묵묵히 소주잔만 비워냈다.

    그리고 인터뷰 뒤인 지난 현충일 대전 현충원에서 부부를 다시 만났다. 사병2묘역 29번 묘판 묘비번호 14828에는 이들 부부와 신혼인 둘째 동민씨 내외가 함께 있었다.

    법 없어도 살 마음 착한 사람들. 그런데 국가는, 사회는 왜 이들 가족을 끝없이 아프게 하고 배신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