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완희 박사 ⓒ 뉴데일리
    ▲ 김완희 박사 ⓒ 뉴데일리

    무슨 시찰이었더라? 장소는 구미였다. 아침 일찍 구미로 떠나려고 온양의 한 숙소에서 일찍 잠이 들었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의 모습은 저녁 TV 뉴스로 봤다.
    다음날 아침 몇 시나 됐을까? 이른 시간이었는데 동행했던 한 사람이 방문을 두드렸다.
    “김완희 박사, 큰 일 났습니다.”
    그의 손엔 박 대통령 유고 소식을 주먹만한 활자로 담은 조간신문이 들려있었다.
    “이럴 수가…”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아침이었다.

    젊은 세대에겐 낯선 ‘김완희(金玩熙)’라는 이름. 하지만 ‘IT 강국 한국’이라는 자부심을 갖는 이라면 우리는 이 ‘김완희’라는 이름에 감사해야 한다. 보릿고개 넘기는 일이 전 국민에게 큰일이던 가난한 한국에서 전자산업의 싹을 심고 기르고 개화시킨 주인공인 때문이다.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도와 전자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재미 과학자 김완희 박사가 최근 방한, 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주고받은 친필서한 103점을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기증했다.
    김 박사가 40여 년 간 간직해온 이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서한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 박사가 1967~1979년까지 13년간 주고받은 것들. 박대통령 친서와 이후락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전문(電文) 등 소중한 기록들이 담겨 있다.
    6월4일 미국으로의 출국 1시간을 앞두고 웨스턴조선호텔에서 만난 김 박사는 조금 몸이 불편한 듯 보였다.

    김 박사는 올해 84세의 고령. 추억이 소중할 연배에 개인적으로 소중한 추억일 편지들을 국가기록원에 기증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혼자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국민들이 알게 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주위의 권유도 많았고요. 무엇보다 가난을 벗기 위해 전자산업 육성에 밤낮이 없었던 박 대통령의 노력을 재평가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100여 통의 편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있을 것이었다.
    “박 대통령 참 섬세한 분이에요. ‘한국 생활이 어떠냐? 연구비 형식으로 돈 조금 보내니 생활에 보태라’라는 편지를 받았을 때는 마음이 뭉클하더라고요.”

    미국에 살던 김 박사가 박 대통령의 부름으로 한국에 오면 박 대통령이 항상 2000달러 정도가 든 누런 봉투를 건넸다. 당시 미국을 왕복하는 항공료와 비슷했다. 미국으로 보내오는 편지에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이 참 검소했어요. 봉투도 편지지도 정말 대통령이 쓰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악했고…. 요즘 대통령들 스캔들 나면 보통 몇 백 억원이잖아요. 정말 그런 점에선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김 박사는 박 대통령과의 만남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1967년 9월 3일. 미국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교수이던 김 박사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한국의 전자산업 육성에 대해 보고를 했다. 박 대통령, 박충훈 상공부 장관, 신범식 대변인, 한준석 비서관이 참석했다. 두 시간 반 동안 보고를 하며 김 박사는 처음엔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던 박 대통령을 다시 보게 됐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교단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왔지만 박 대통령만큼 집중해서 듣는 학 생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보고를 하면서 보니 전문적인 내용도 박 대통령은 이해하는 듯 했습니다.”

    보고가 끝나고 김 박사는 박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했다. 대통령은 김 박사의 숟가락 위로 손수 깻잎을 얹어줬다.
    “김 박사, 이거 기억납니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김 박사가 왔다니까 집사람(육영수 여사)이 준비한 모양이오.”
    식사가 끝나자 박대통령은 김 박사를 서재로 안내했다. 그리곤 책상에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올려놨다.
    “김 박사, 미국 모토롤라가 한국에서 이걸 만들겠다고 하면서 공장부지 매입을 허가해 달랍니다.”
    김 작사는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있었다고 기억했다.
    “요 쪼매난 것이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가 된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주시오!”라고 말하는데 박 대통령의 굳건한 경제건설 의지를 ‘차마 외면할 수 없더라’고 김 박사는 회고했다.

  • ▲ ‘전자공업 5개년 계획’을 보도한 1968년 8월 2일자 조선일보. ⓒ 뉴데일리
    ▲ ‘전자공업 5개년 계획’을 보도한 1968년 8월 2일자 조선일보. ⓒ 뉴데일리

    그로부터 1년 뒤인 1968년 8월 1일. 김 박사는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조사 보고서’를 박 대통령에게 내놓았다. “국내에서 독자 기술을 개발하면 늦고, 어떻게든 선진 기술을 도입해 수출 제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거국적인 지원으로 단기간에 전자공업을 육성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인 8월2일 조선일보는 ‘전자공업 종합 5개년 계획 대통령 재가’라는 내용을 보도했다.
     
    “박 대통령은 참 결단이 빠른 분이었어요, 그만큼 많은 사전정보와 지식이 있다는 얘기지요. 브리핑 때 보면 배석한 관계 장관들보다 훨씬 수치나 내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김 박사는 “군 출신 대통령이어서인지 능률적인 일처리로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게 모든 편의를 봐주셨다”고 말했다.
    “전자산업이 낯설다보니 여기저기서 장관들이 의문을 제시하거나 비협조적인 때도 많았어요. 그때마다 박 대통령은 호쾌하게 정리를 해주셨습니다.”
    김 박사는 TV 특소세 인하를 한 예로 들었다.
    “70년대 당시 TV 특소세가 35%나 됐어요. 대통령께 인하 필요성을 말씀드렸더니 바로 15%로 내리시더라고요. 재무부 장관이 반대했지만 ‘전자산업 육성을 위해 하는 일’이라며 밀어붙이셨습니다. 당시 중동에 나가있던 근로자들이 한국 제품을 사면 관세를 안 물게 한 것도 제 건의를 받아들인 박 대통령의 결심이었습니다.”

    김 박사의 발품과 박 대통령의 추진력으로 한국의 전자산업은 탄력을 받는다. 
    1966년 첫 국산 TV를 만들었던 금성사(현 LG전자)가 선두주자로 나섰고, 삼성도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쟁체제에 들어갔다. 1965년 180만 달러였던 전자산업 수출액은 1976년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TV와 라디오, 집적회로, 콘덴서, 녹음기, 브라운관 등이 주요 품목으로 떠올랐다. 1974년에는 한국반도체주식회사가 설립돼 미래의 '국가적 텃밭'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한번은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박 대통령이 처음 보는 사람을 가르치며 제게 말해요. ‘김 박사. 이 사람이 대우 김우중이요. 잘 좀 도와줘요’ 그러시더군요. 얼마 뒤에 제가 머물던 호텔로 김우중 회장이 찾아왔어요. 그게 대우전자의 출발이었습니다.”
    김 박사는 당시 전자산업 육성이 가난하고 자원 없는 한국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최고의 선택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 ▲ 김완희 박사와 부인 노정숙씨. ⓒ 뉴데일리
    ▲ 김완희 박사와 부인 노정숙씨. ⓒ 뉴데일리

    소중한 추억을 고국에 돌려보낸 김완희 박사가 기억하는 박 대통령은 어떤 사람일까?
    “소중한 기회를 준 분이자 또한 가장 나를 힘들게 한 분입니다.”
    김 박사는 박 대통령의 자립경제 의지에 끌려 미 컬럼비아대 종신교수라는 명예와 부를 버리고 귀국했다. 부인 노정숙 여사를 비롯해 주위 모두 만류했다. 미국 동료 교수들도 심지어 “미쳤느냐”고 반대를 했다. 하지만 귀국해 조국의 전자산업을,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서거로 ‘하고픈 일을 중도에서 그만두어야 하는 아픔’도 주고 떠났다.

    1979년 10월26일 박 대통령의 서거에 앞서 감 박사가 박 대통령에게 한 마지막 건의는 컬러TV 허용이었다. TV 한 번 보려면 동네 부잣집 아이 눈치 보며 그나마 방안도 아닌 마루에서 숨죽여야 했던 시절이 1960~1970년대였다.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 가난한 조국을 둔 학자에게 보낸 편지는 누렇게 변색되어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잊지 못 할, 잊어선 안 될 소중한 기억들이다.

    <친애하는 金玩熙 박사에게!
    貴翰 감사합니다. 하와이 방문은 많은 在美 교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아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北美 本土에 계시는 교포들도 똑같이 환영해 주시는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덕택으로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4월20 일 귀국했습니다. 7월경에 귀국하신다니 또다시 相逢의 機를 苦待하면서-. 貴 家庭에 萬福이 깃들기를 祝願합니다.>


    <김완희 박사는?>
    192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경기고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미 유타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땄다.
    미국 IBM 책임연구원, 미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주임교수를 역임하던 중 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6년에서 1979년까지 대통령특별자문, 상공부-체신부 및 과기처장관 고문을 지내며 한국 전자공업육성의 틀을 마련했다. 현재 ITU (International Technological University) 고문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