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법부의 트렌드가 심상치 않다. ‘촛불’ 때 경찰관을 옷 벗기고 두들겨 팬 자들, 경찰관에게 염산병을 던진 자들, 새총을 쏘아대며 난동을 부린 자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주거나 벌금형으로 풀어주었다.

    법관들의 판결은 시비의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는 측면이 있는 줄은 안다. 그러나 사법부의 이런 트렌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는 질문 정도는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보다 수 십 배나 더 민주주의가가 발전해 있는 나라들에서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관을 그렇게 두들겨 패면 사법부 등 국가권력이 그것을 어떻게 추상같이 응징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왜 이런 ‘국가의 취약성’이 일반화하고 있는가? 첫째는 법관의 세대교체를 꼽을 수 있다. 386 이후세대는 한 마디로 ‘국가 권력’을 무조건 ‘억압적 폭력기구’로 죄악시 하는 풍조에 노출되어 온 세대다. 딱히 본격좌파가 아닌 사람들일지라도 사회 현상을 의레 그런 ‘약간 왼편’의 교과서에 의거해서 봐야만 ‘지식인적’이라고 생각하는 세대가 바로 그들인 것이다.

    이런 시각은, 비록 일탈적인 면모를 수반했다 하더라도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것은 ‘범죄적이지만은 않은 일’ ‘관용될 될 수 있는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약간(?)의 폭력(gewalt)을 동반하는 비(非)제도적 반대행위는 일탈이 아니라 참여(participation)의 한 형태로 봐주자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시각은 이용훈 대법원장의 ‘국민 여망에 따르는 재판’이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대단히 고무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법관은 밀실에 들어 앉아 오로지 법의 잣대로만 판결해야 한다는 전통적 사법관으로부터의 철학적인 이탈인 셈이다. 적절한 표현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사법부의 포퓰리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망 즉 여론 즉 ‘목소리 큰 자들’의 아우성에는 썩 유리한 트렌드가 아닐 수 없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어쩌면 학부시절부터, 이런 트렌드를 체질화 한 세대는 자기들끼리 동아리 형태의 동질성을 띠어가면서 점차 사법부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영주 변호사가 본인에게 해 준 말이 새삼 생각난다. “검사 시절에 검사 지망생들의 최종 면접고사를 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들 거의 모두가 ‘미국 주적론’에 젖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제헌정신에 비추어 작금의 사법부의 동향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