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홍준호 워싱턴 지국장이 쓴 '노무현보다 못한 사람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미 FTA의 앞날에 대한 미국 워싱턴의 기류는 양갈래다. 한쪽에선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결정으로 미국 의회의 분위기가 호전됐고, 이를 바탕으로 의회의 비준을 끌어낼 수 있게 됐다며 낙관의 불씨를 지핀다. 다른 한쪽엔 여전히 연내 비준은 힘들고 올해를 넘기면 결국 양국 정부 간 협정문은 휴지조각이 될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 살아 있다.

    낙관론의 불씨를 살려 가려는 쪽은 부시행정부이다. 각료들이 민주당의 핵심들을 일일이 설득하러 다니고 공화당에선 민주당이 바라는 안건을 합의 처리해주는 대신 한미 FTA의 비준 동의를 받아내는 당 차원의 빅딜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여기에 걸림돌은 11월 미국 대선이다. 8년 만의 정권 탈환을 노리는 민주당으로선 지지층인 노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한미 FTA 재협상을 공언해온 대선주자들(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바)의 체면도 고려해야 한다.

    미국 의회의 결정권을 쥔 민주당이 궁극적으로 어느 쪽을 택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한미 FTA를 죽이는 길로도, 살리는 길로도 갈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적어도 민주당의 대선주자 결정(늦어도 8월 전당대회) 이전에 미국 의회의 방향을 비준 쪽으로 잡아 놓지 못하면 한미 FTA는 미국 대선의 파도에 휩쓸려 실종될지도 모를 운명이란 사실이다.

    한국 국회에선 미국 의회도 비준 안 했는데 왜 우리가 먼저 서두르냐는 말도 들린다. 한가한 소리다. 우리가 FTA를 안 할 거라면 몰라도 할 것이라면 먼저 비준해 놓고 미국을 향해 "보호무역하자는 거냐" "그렇게 자신 없나" "한미동맹 할 생각 없나"라고 큰소리치는 쪽이 훨씬 전략적이고 당당하다.

    통합민주당의 손학규 대표는 총선이 끝나면 한미 FTA를 비준해줄 것처럼 말해 오다 최근 방향을 틀고 있다. 쇠고기 청문회를 요구하고 FTA의 조기 비준도 어려울 듯 말한다. 물론 정부를 상대로 따질 일이 새로이 생겨나서 그렇겠지만, FTA에 부정적인 당내 강경파들을 의식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얼마 전 손 대표는 한 모임에서 당내 강경파들을 겨냥, "노무현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마다 노 전 대통령 때문에 당이 망했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실제론 노 전 대통령보다 더 세상 물정 모르는 구닥다리 정치인들이 당내에 많아 답답하다는 심경을 토로하다 나온 말로 알려졌다.

    민주당 안에 결국 한미 FTA로 가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손 대표 말고도 많을 것이다. 대표적인 경제통인 김효석 원내대표나 지난 정권에서 장관, 경제부총리, 대통령 비서실장, 수석비서관을 지낸 쟁쟁한 의원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따질 것들은 따져야 하겠지만, 결국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하지 않을 수 없고, 한미 FTA를 되돌리려는 건 바보짓이란 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워싱턴의 한국통들은 한미 FTA를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이래 양국 간 가장 중요한 협정이라고까지 평가한다. 물론 우리에겐 세계 최고 경제권과의 밀착에 따른 기회와 함께 위험 요소도 따라다닌다. 만약 그 위험 요소에 따른 우려와 반발 때문에 발을 빼버리면 우리는 앞으론 싸구려 나라들과 더 자주 더 많이 어울려야 한다. 일류와 섞여 지내면 일류의 뒷모습이라도 닮게 되지만, 당장 놀기 편하다고 3류들과 어울리다 보면 우리의 앞모습마저 그들 꼴이 되고 만다.

    사실 야당 입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요즘 행태를 보면 울화가 치미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정작 세계 무대 돌아가는 걸 아는 프로들은 입 다물고, 아마추어들의 큰소리에 마냥 끌려 다니는 건 민주당의 앞날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길게 볼 때 한미 FTA의 성공은 노무현 정권의 업적이 되지 그 뒤치다꺼리를 한 이명박 정권의 공으로 남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당이 10년 전 야당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10년간의 국정 경험을 살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야당'으로 발돋움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