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절반의 승리'>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신없이 흘러간 선거기간이었지만 막상 투표일인 19일 오후6시 텔레비전 방송의 출구조사가 ‘이명박 후보 당선 확실’이라는 예상을 보도했을 때, 많은 국민들은 비로소 “아, 지난 10년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깊은 감회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지난 10년을 ‘50년만의 호기(好機)’로 생각했을 김정일, 지난 10년을 ‘되찾은 10년’이라고 생각했을 김대중, 지난 10년을 ‘별놈의 보수’ 죽이기로 삼았던 노무현에게는 그 순간은 분명 악몽 중의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쪽의 대한민국 진영에는 이번 대선 결과는 10년간의 길고 깜깜한 터널의 끝이었다.

    일부 ‘먹물’들은 지난 10년이 민주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치러야 했던 일종의 ‘역사적 홍역’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식이라면 크메르의 학살자 폴 포트의 킬링 필드나 마오쩌둥의 문화혁명도 민주화, 선진화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키우 삼판(폴 포트의 2인자)에 대한 최근 크메르 당국의 검거와 제소, 그리고 마오쩌둥을 비판한 덩샤오핑의 중국은 그것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지난 10년을 민주화·선진화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주장한다면, 박정희의 유신 8년도 산업화를 이룩하기까지의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설정하겠다는 뜻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권위주의 30년 만에 찾아온 민주화는 물론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사태였다. 그러나 그 민주화 물살에 편승해 그것을 극좌 민중혁명으로 애써 견인하려 했던 지난 세월의 ‘음험한 한 가닥’만은 결코 보편타당성을 인정해줄 수 없는, ‘미친 부류’들의 ‘굿거리’였다. 김근태의 말을 역으로 써먹는다면, 그것은 홍위병 ‘치매인’들의 ‘아류 문화혁명’이었을 뿐, 반드시 거쳐야 했던 ‘역사의 필연’이 아니었다.

    이번 대선 결과는 지난 세월이 동반했던 그런, 반드시 필연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음험한 한 가닥’에 대한 절대다수 유권자들의 단호한 노(No)였다. 일부 논자들은 무슨 ‘중도 40%의 선택’ 어쩌고 하면서 이번 선거에 반영된 국민적 ‘좌파 단죄’의 의미를 애써 희석하려 한다. 그러나 12·19 대선은 그런 ‘식자우환(識者憂患)’들이 뭐라고 ‘썰’ 풀든 말든, 김대중-노무현이 대표한 남쪽의 ‘문화혁명세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준엄한 심판, 그리고 대한민국 수호 진영의 제2의 ‘인천 상륙 작전’이었다.

    대한민국 진영은 그러나 이제 겨우 반쪽의 승리를 거둔 것에 불과하다. 청와대만 탈환했을 뿐, 행정부 국회 문화 학술 미디어 출판 영상 종교계에 파고든 각 분야의 반(反)대한민국 요소들은 여전히 깊고 광범위하게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본 여학생들이 일부 픽션화된 장면까지 마치 사실인양 믿으며 치를 떨었다는 이야기를, 이명박 당선자도 아마 들어서 알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문화혁명’의 에누리 없는 실상이다.

    비대한 정부, 철 밥통 관료, 불가사리 위원회들, 방만한 공기업, 세금 폭탄을 정리해서 한국을 기업하기 좋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한미 동맹을 복원하고, 불법 집단난동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도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문화 권력을 되찾아 오는 일이다.

    이명박 당선자가 진정으로 ‘건국~산업화~민주화’에 이은 제4 세대 대한민국의 견인차가 되려 한다면 그는 집권 초기에 대한민국 되찾기를 향해 일대 전격전을 감행해야 한다. 우리의 후속 세대가 ‘태백산맥’ ‘좌파 역사교과서’ ‘동막골’ ‘빨치산 추모제’에 계속 끌려다니는 한, 이 나라는 여전히 ‘빼앗긴 들판’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시대’의 성패도 결국은 ‘경제 실용주의’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문화 헤게모니 쟁탈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