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 '포럼'에 문학평론가인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8월20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결과를 발표하는 장면은 정권 교체를 갈망하는 야당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준 드라마였다. 경선 기간 내내 당내 후보들이 벌인 치열한 검증 공방과 박빙의 승부는 우리 정치사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대 장관(壯觀)을 이루었다. 결국 이날의 승자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으로 결정됐고, 끈질긴 추격을 벌였던 박근혜 전 대표는 석패(惜敗)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박 전 대표가 짧은 정치 경력에도 불구하고 전국을 석권하는 정치 지도자로 급속히 성장했음을 입증해준 자리였다.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이 잇단 부패 스캔들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당이 무너질 정도의 위기를 맞았던 시절 대표직을 맡아 당을 개혁하고 국민의 지지를 되찾았다. 그래서 한때 많은 국민은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를 뽑는 직접선거에서는 이겼지만 결국 허점 투성이인 여론조사의 덫에 걸려 석패하고 말았다. 이때 그가 받은 심리적 타격과 충격은 지난해 지방선거 유세도중 괴한으로부터 당한 끔찍한 자상(刺傷)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보다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여유 있는 웃음까지 보였다. 그리고 승자인 이 전 시장과 당원·대의원들 앞에서 경선에서 패배한 것을 깨끗이 승복한다는 말도 남겼다. 과거 많은 우리 정치인이 상황에 따라 원칙과 약속을 철저히 무시했던 경우를 생각해 볼 때 그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박 전 대표의 ‘아름다운 승복’은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정치 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결과로 보기에 충분했다. 경선 패배를 승복하는 박 전 대표의 연설이 끝난 후 언론과 국민이 하나같이 그의 승복을 ‘아름다운 승리’라며 그에게 갈채를 보낸 것이나, 당내에서 가끔 비판적이었던 원희룡 의원까지도 “박 후보의 대인(大人) 같은 모습에 진심으로 존경과 위로를 보낸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박 전 대표는 비록 경선에서 패했지만 또 한번 정치 시험대에 올라 국민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으며 더 큰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경선 과정이 너무나 치열해서 두 선두 주자 사이의 골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박 전 대표의 ‘아름다운 승복’이 있기 전만 해도 많은 국민은 한나라당이 붕당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정권 교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울분과 아픔을 초인적으로 삭이고 참아 내었다. 박 전 대표의 ‘아름다운 패배의 인정’은 실로 그 자신은 물론 우리 국민 모두에게 전에 없는 새로운 ‘정치적 자산’이 되기에 충분하며, “어떤 종류의 패배에는 승리 이상의 승리가 있다”는 미셸 몽테뉴의 말이 사실임을 현실에서 증명해준다.

    허물어져 가던 한나라당을 재건시키는 데 성공한 박 전 대표는 여성에 대한 후진적인 편견과 상대 후보의 ‘경제 대통령’ 브랜드 전략으로 인해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신의를 저버리는 해바라기 배신자들이 난무하며 조직과 자본이 위력을 떨치는 우리 정치판의 현실 속에서도 그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고 대의와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의 성공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여론이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적지 않은 당원과 위원들이 동지애(同志愛)를 잃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그와 함께한 것은 ‘박근혜 리더십’이 범상치 않음을 입증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제 한나라당 경선은 모두 끝났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명박 전 시장은 ‘살생부’같은 것은 버리고 박 전 대표와 더불어 정치적 에너지를 결집시켜 본선에서 당당히 심판 받는 모습을 기대한다. 이 후보가 박 전 대표를 얻는 것은 대선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는 것과 다름없음을 국민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