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박성희 이화여대 언론홍보 영상학부 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 한 달 남짓 한나라당 예비후보 경선 토론회를 지켜보다 문득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시절 연설이 궁금해졌다. 집권 후 그의 말이 일으킨 풍파야 익히 아는 대로지만, 후보 시절 대체 무어라 했기에 사람들을 움직였는지 새삼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노 후보는 자신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라고 했다. “고졸 출신으로… 출세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웃의 아픔을 외면한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을 “일부 특권층만이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며 잘사는 나라”로 진단하고, “특권 의식과 반칙 문화를 청산하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오롯이 국민의 축에 놓고, 반대편에 그 밖의 것, 즉 한나라당-이회창 후보-특권층-재벌-낡은 정치-지역주의를 배치시켰다. 자신의 표현대로 ‘돈도, 가신도, 계보도 없는’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결국 이런 말 덕분이다.

    ‘나눗셈의 정치’에 탁월한 그는 한 번쯤 설움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훑어내렸다. 그의 이분법이 집권 후 끊임없는 편 가르기의 전주곡이었다는 걸, 사람들은 그때 몰랐다. 그렇다고 그를 대단한 정략가로 여길 일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란 세상의 권력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동일화의 수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메시지 분석법의 하나인 ‘드라마티즘’의 창시자인 케네스 버크(Burke)는 아돌프 히틀러(Hitler)의 연설문 분석을 통해 그가 어떻게 당시 독일 국민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데 성공했는지 밝혀냈다. 히틀러가 그려내는 드라마 속에서 히틀러 자신은 독일병을 치유할 묘약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런 영웅 뒤에는 반드시 희생양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이유로 버크는 유대인 학살극의 전조가 이미 그의 연설 속에 깃들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버크는 더 나아가 히틀러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의 흥행을 꿈꾸며 동일화의 수법을 재연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나 ‘보통사람’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정치 수사(修辭)이다. 아무리 슬픈 영화라도 자신과 오버랩되지 않으면 눈물이 나오지 않듯이, 아무리 훌륭한 비전이라도 국민이 상관없다고 느낀다면 표를 얻을 수 없다.

    임기가 다해 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시절 연설문을 읽고 ‘그때 이미 보수 언론과의 대립이 예견되어 있었다’며 분석하는 일은 부질없는 일이다. “퇴임할 때는 지금 제가 살던 집으로 그대로 돌아갈 것입니다”고 해 놓고, 지금 고향에 널찍한 집을 신축하는 일을 비판하는 것도 때늦은 일일지 모른다. 두려운 것은 노무현 자체가 아니라 ‘노무현 드라마’의 재연이고, 중요한 건 어느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하고 뒤늦게 후회하지 않는 일이다.

    다시 한나라당 경선 토론으로 화제를 돌리면, 정책 선거의 의지는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정책 비전이 그려내는 전체적인 그림은 ‘잘살아 보세’를 배경음악으로 깐 한 편의 낡은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배우(후보자)들의 연기력(토론 실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의 카츠 교수 등은 1960년 이후 31개 후보토론을 분석한 결과, 토론의 승패가 최종 선거에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더구나 전통적으로 동양사회에서 눌변은 흠이 아니다. 토론에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버크는 사람들이 먹는 것을 좇듯이 드라마를 본능적으로 추구한다고 했다. 최근 두 번의 대선에서 연거푸 패한 한나라당이 이번 선거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 후보들이 갖고 있는 ‘동질화의 재료’를 찾아내 감동의 드라마로 엮어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당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재미있고 유익한 드라마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싶기는 국민들도 한결같은 마음이다. 12월 대선은, 결국 ‘누가 누가 잘하나’가 아니라, ‘누가 누가 나랑 같은가’의 한판승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