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6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란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아름다운 경선'은 없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성서의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구절이 여러 번 등장한다. 하느님이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결과에 만족했다는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창세기 때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민이 보기에 아름다운 경선'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다.

    정권을 바꾸려는 의지가 확고할수록, 또 한나라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을수록 '아름다운 경선'에 대한 희망도 강하다. 현재 드러난 대선 예비 후보자 여론조사에서 1, 2, 3위를 한나라당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흠집 내지 않고, 네거티브 캠페인이나 흑색선전도 하지 않고,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씨 모두 경선에 참여하게 한다면 정권 교체에 성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선이 이뤄질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로또에 1등 당첨될 확률보다 더 낮다고 봐야 한다. 정치는 가장 원초적 욕망이 충돌하는 세계이기에 그렇다. 권력을 향한 의지가 약하거나 없는 사람은 아예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런 정치인들이 가장 큰 권력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 것이 대선이다. 거기서 "내가 가진 것을 내놓고 잘한 것은 잘한 것대로, 내 능력은 내 능력대로 보여주고, 용서를 구할 것은 구한다(손학규)"는 건 한낱 꿈일 뿐이다.

    형제간에 사이가 벌어지면 남보다 못하다고 한다. 남과는 다시 손잡을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좀처럼 화해하기 어렵다. 배신감 때문이다. 배신은 가까운 사람들, 믿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당내 경선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이유다. 더구나 한나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박 갈등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력들은 탐색전 성격의 1라운드 검증공방만으로도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이미 공식석상에서 마주쳐도 외면할 정도가 됐다. 상대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로 선출되고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 온다면 자신들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그들을 외곬로 몰아가게 돼 있다.

    그래서 검증공방은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당의 만류로, 또는 여론에 밀려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할 수는 있어도 갈 데까지 가야 끝난다. 선거란 상대 후보에 비해 정책과 능력·도덕성에서 내가 낫다는 것을 유권자에게 설득해 가는 과정이다. 비교 우위는 내 장점을 부각하는 것으로도 가능하지만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가능하다. 정치인들은 경쟁 상대의 취약점을 뻔히 알면서 덮고 갈 만큼 점잖지는 않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민주당 대선 유력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과 배럭 오바마도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경선이 끝난 뒤 패자들이 결과에 기꺼이 승복하고 선거대책 위원장 또는 본부장의 역할을 맡는 '멋진 경선'도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건 역대 대선 후보 경선의 역사가 입증한다.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온 YS는 경선에서 패한 뒤 승자 DJ의 손을 들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했지만 "지원 유세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게 DJ 측 지적이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해야 한다"는 그때의 명분이 "더 이상 진보세력에 정권을 맡길 순 없다"는 지금의 명분보다 약해서 그랬을까. 내부의 경쟁자가 외부의 적보다 더 싫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97년 한나라당 경선, 2002년 민주당 경선도 심각한 후유증이 있었다.

    "후보 검증절차를 제도화하자"거나 "당이 후보를 검증하자"는 제안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성이 없다. 자칫 후보를 검증할 언로를 차단할뿐더러 그런 검증을 신뢰하기도 어렵다. 그럴 바엔 차리리 후보 간 검증 공방의 길을 확 터주는 건 어떨까. 다만 인신모독적 성격일 경우 분명한 증거를 제시토록 하고, 허위로 드러나면 후보 본인에게 무거운 책임을 묻는다는 전제하에서. 축복 속에서 경선을 치르고 본선에서도 손쉽게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없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