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려고 하는 분은 최소한 통합 리더십을 지녀야 한다. 한 때 히딩크 리더십이 유행했었고, 히딩크 리더십 전에는 CEO(Chief Executive Officer : 최고경영자) 리더십이 유행했었다. 이미 CEO리더십으로서는 국가 경영을 할 수 없다. 히딩크 리더십은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뚜렷한 목표를 제시했었고, 구성원을 끝까지 믿었었으며, 조직을 하나의 유니트로 묶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기본이 되는 체력과 스피드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전술전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히딩크 리더십이 각광을 받았던 것은 민주적 리더십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수들로 하여금 이길 수 있다는 신념체계를 지닐 수 있는 자신감의 함양(涵養)이다. 또 자신의 선수들을 끝까지 믿을 수 있다는 지도자의 신념은 곧 선수들로 하여금 히딩크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또 다른 신념을 창출해 낸다.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가장 엄정한 원칙을 고수할 수 있다는 것은 히딩크 리더십의 민주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히딩크 리더십 전에는 우리 사회에서 만연했던 리더십의 대표성이 곧 CEO형 리더십이었다. 그러나 CEO리더십은 민주적 리더십이 아니고, 자율적인 바탕보다는 타율적 근본위에 세워진 비(非)민주사회구조의 카리스마적 냄새가 풍기는 리더십의 일종이다.

    앨런 액슬로드가 쓴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라는 책을 보게 되면, CEO 국가 지도자상의 대표성이 잘 수록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할 당시 의회의 견제 때문에 왕권은 취약화 되어 있었고, 종교는 신·구교도간에 엄청난 대립과 반목이 횡횡했으며, 경제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있었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영국은 스코틀랜드, 프랑스, 에스파니아와는 적대관계에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소위 개혁드라이브를 걸었다. 내용으로 볼 때 왕권을 견제해왔던 의회와 당근과 채찍으로 적절한 타협을 시행했었고, 그래서 왕권 및 분열의 정치를 다소간 안정시키고 완화시키는데 기여했었다.

    경제적 난관을 타파하기 위하여 화폐개혁을 단행했으며, 당시 세계적인 문호인 셰익스피어가 출연할 정도로 문화적 기틀 또한 엘리자베스 1세가 마련했다. 정략결혼으로 다른 주변의 적대국들과의 불편한 적대관계를 완화시키는데 성공했고, 당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에스파니아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해적(海賊) 선장을 중용하여 해상권까지 강화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과거 왕권이나 독재 권력이 뒷밭침하고 있던 과거의 시대와 전혀 다르다. 과거의 시대정신과 지금의 시대정신은 하늘과 땅 차이다. 기업과 정치가 경영적인 측면에서 유사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상으로 적시해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떻게 국가 목표와 개인 회사의 목표가 같을 수가 있는가? 따라서 결코 CEO리더십으로는 국가경영을 할 수가 없다. 만약 대선주자들이 CEO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시대정신에도 부적합할뿐더러 CEO리더십으로는 국가를 경영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국가목표는 결코 사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목표와는 동일시 할 수 없는 위대한 특성이 있다. 과거에는 왕이나, 독재 권력이나, 민중 독재 권력이 어떤 목표를 위해서 자기의 신념체계 달성을 위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었지만, 지금 민주국가에서는 왕이나, 독재 권력자나, 민중 독재 권력자처럼 자기의 뜻대로 목적을 세워 수단을 결코 정당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CEO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는 도덕을 중시한 군주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막강한 권력을 갖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술수를 부렸던 마키아벨리형 군주라고 밖에 칭할 수 없겠다.

    지금 대선주자들이 지녀야할 리더십은 속칭 CEO형 리더십이 결코 아니어야 한다. 다시 제론하지만 이윤추구를 지상과제로 삼고 밀어붙였던 CEO형 리더십으로 국가경영을 하려고 달려든다면, 그 시대는 다시 과거의 독재 권력시대로 회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

    엘리자베스 1세는 원칙을 지키라고 교시를 해 놓고, 정작 본인은 불법한 해적(海賊)을 중용하여 전시(戰時)도 아닌 시대에 에스파니아를 침략함으로써 비윤리적인 왕권을 정당화 시켰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CEO적 국가경영에서 현대경영의 전략과 전술을 체득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현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기업 구조적 측면에서 이를 응용하거나, 수용하려 달려든다면 이것은 시대정신에 맞지 않아 당장 무리가 일어나고 실패하게 된다.

    경영 철학적인 관점에 있어서도 독재 권력시대의 CEO형 지도자가 현대적인 자유 민주형 CEO지도자가 결코 될 수 없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다양한 사회조직은 다양성 있는 지도자의 리더십을 요구하게 된다. 다양한 사회 각 기관의 분석에 따른 구조적 적합성이 있는 다양화된 리더십은 곧 통합 리더십뿐이다.

    국가가 어떻게 기업일 수가 있는가?
    군대가 어떻게 기업일 수가 있는가?
    학교는 어떻게 기업일 수가 있는가?

    만약 국가의 대통령, 군의 수뇌부, 대학총장 등이 CEO형이 되어 기업이 지닌 속성인 기업경쟁, 이윤추구의 효율성 등등을 기업관리 차원에서 국가나 군대 그리고 대학을 경영하려고 달려든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겠는가? 국가는 특히 민주 자유국가는 국가통치철학이 민주와 자유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 또 대학은 민주 자유국가에서 통용되는 자유스러운 교육철학이 전제되어야 한다.

    CEO형 리더십으로 국가를 경영하려는 지도자나 또는 CEO형 리더십을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덕목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민주 사회의 다양성이 배제된 지난 시대적 리더십의 가치에 연연해 있다고 보아 틀림없다.

    만약 대통령이 CEO적 마인드로 기업의 이윤추구, 경쟁, 효율성이라는 관리차원에서 국가를 경영하려고 달려든다면, 민주주의의 대원칙들은 분명히 위축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민주주의 원칙들은 위축을 넘어 훼손이 될 것이고, CEO국가경영 사회는 그로 인한 분열의 리더십으로 고통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민주주의 자유 국가에서 필요한 리더십은 통합리더십이어야 하고, 애국심이 있어야 하며, 원칙이 있는 국가통치철학이 통합리더십의 가치 속에 흠뻑 녹아 있어야 한다.

    시대는 발 빠르게 변화한다.
    변화에 따른 적응과 그에 따른 국가경영은 시대정신이 그 누구보다도 투철하여야만 국가경영에 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결국 이 시대를 거머쥐고 갈 수 있는 대선주자의 모습으로는,

    첫째, 높은 국제적 감각과 국제 경영가적 능력을 보유한 국가경영자여야 한다.

    둘째, 좌파정권의 교육방책으로 황폐화된 우리의 교육을 쇄신시킬 수 있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자유 민주교육에 대한 확고한 청사진과 확신을 지녀야 한다.

    셋째, 양극화 속에서 좌파정권이 지향했던 분열의 위장 복지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 사회의 국민이 누려야 할 노후, 일자리, 교육, 국민건강에 대한 이데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자유 민주 대한민국에서 대통령되고자 하는 분들이 많기도 많다.
    진정한 대통령 감을 고르는 것도 국민된 숭고한 의무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대통령의 리더십은 다양한 사회의 숫한 명제를 통합할 수 있는 통합리더십이다. 결국 CEO형 리더십은 시대정신과 전혀 다른 이윤추구라는 기업경영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래서 과거 CEO형 리더십은 자유 민주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으로는 매우 부적합한 전 근대적 개념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객원 칼럼니스트의 칼럼은 뉴데일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