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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이 신문 객원논설위원인 이석연 헌법포럼 상임대표가 쓴 '대한민국 헌법 흔드는 대북거래 말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바야흐로 오늘의 한국사회에는 헌법을 이념 논쟁의 대상으로마저 삼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대한민국 헌법의 정신과 그에 바탕을 둔 국가정통성을 강조하면 이를 보수 내지 우익적 주장으로 보는 식자들이 줄지어 있다. 헌법을 망국적 편 가르기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 이는 대통령 직 수행과 헌법의 준수를 마치 별개로 보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헌법이 추구하는 가치 내지 이념은 좌우, 보혁의 그것을 뛰어넘는 상위 개념이다. 국가선진화전략이나 남북의 공동번영을 목표로 한 정책도 헌법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하다. 서구나 일본 등의 좌파세력이 그 나라 헌법의 틀을 준수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좌파 내지 혁신세력은 헌법적 체제 수호를 우익 내지 반통일 행태로 몰아붙이면서 이를 뛰어넘으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서구사회에서 헌법을 공격, 훼손하는 정치세력이나 지식인들이 설 땅이 없는 것과 크게 다르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현 정권의 정략적 국정 운영에 대해 헌법적 시각에서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 결과 좌파 진영으로부터 개혁 발목잡기라느니 심지어 수구, 우익 꼴통이라는 공격까지 받았다. 과거 15년간 공직에 있을 때도 나는 헌법에 입각한 같은 주장을 했다. 그때는 오히려 좌파 내지 운동권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제 우리 사회가 그만큼 좌로 심하게 기울었음을 입증한다.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이념과 가치관을 넘어서 합의할 수 있는 기본 텍스트는 바로 헌법이다.
헌법은 국민 통합의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 통일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우리 헌법이 채택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는 우리에게 오늘의 국가적 번영과 민주화를 가져다주었다. 반면 같은 시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채택한 일당체제와 중앙통제경제의 사회주의 체제는 북한을 수많은 동족을 굶겨 죽이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시켰다. 역사적으로 현재와 같은 북한체제로는 남북의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은 사실상 불가능함이 이미 증명됐다.
그럼에도 대통령과 통일부 장관 등은 계속해서 북한체제의 변동 내지 붕괴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미국 등 국제사회의 북한체제 변동 시도에 반대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즉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체제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함을 헌법은 천명하고 있다(제4조). 대통령과 모든 국민이 인류보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따라서 북한의 현 체제를 유지한 채 통일정책을 펴겠다는 것은 반(反)헌법적이자 인류 보편의 가치를 거스르는 것이다. 먼저 북한의 경제체제를 시장경제체제로, 이어서 정치사회체제를 자유민주주의체제로 서서히 전환시켜 공동번영의 토대를 마련한 후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순리다.
같은 맥락에서 통일 후 체제의 지향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연방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등도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간다’는 6·15남북공동선언의 통일 방안 역시 헌법이 상정하는 통일 방안과는 거리가 멀다. 명색이 유엔 인권이사국이라는 나라에서 동족인 북한 주민의 비참한 인권 상황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제대로 못하면서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위선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 당국에 많은 것을 양보하고 이를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에 가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대북 접촉 과정에서 헌법이 정한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훼손하거나 변경하는 내용의 거래나 합의를 해서는 안 된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국민적 합의 절차 없이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부여한 바 없다. 1948년 김구 선생은 “38선을 베고 죽을망정 남북 분단은 안 된다”고 하셨다. 이를 본떠 나도 감히 한마디 하고 싶다. “휴전선을 베고 죽을망정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가치를 훼손하거나 포기하는 통일은 바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