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4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에 이 신문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체질적으로 개를 싫어하던 언론인 동료가 아이들 등쌀에 마지못해 애완견 한 마리를 집에 들였다. 개 먹이도 챙겨 주고 똥오줌도 자신들이 치우겠다던 아이들의 다짐은 일주일도 안 돼 부모 몫이 된 것은 물론이다.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그가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자정이 넘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은 가장을 기다리다 먼저 잠드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아이들이 깨어 있더라도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려 제 방에서 건성으로 인사만 건넨다. 하루 한 끼 집에서 하는 식사인 아침도 홀로 먹게 된다.

    그런 그에게 최근 생활에 활기를 주는 일이 생겼다. 평상시 눈길 한번 준 일 없던 애완견이 한밤중에 쓸쓸히 귀가하는 그를 꼬리를 치며 반갑게 맞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귀찮아하던 그도 이제는 애완견의 재롱에 완전히 빠져 ‘품 안의 자식’ 대하듯 한다. 하지만 그가 “40대 후반에 가족이 아닌 애견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왔다. 한집에 살지만 잠만 같이 자는 ‘동거인(同居人)’에 불과해진 오늘날 한국 가족의 현실이 서글퍼서다.

    가족은 영어로 ‘패밀리(family)’다. 노예를 포함해 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모든 구성원을 의미하는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에서 왔다. 중국은 ‘일가(一家)’, 일본은 ‘가족(家族)’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한 지붕 밑에 모여 사는 무리라는 의미다. 반면 한국은 ‘식구(食口)’라는 말을 주로 사용해 왔다. ‘같이 밥 먹는 입’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 가족이란 ‘한솥밥을 먹는 식사 공동체’를 의미한다. 한집에 살아도 한 상(床)에서 밥을 먹지 않거나,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없다면 엄밀히 말해 ‘핏줄’이긴 해도 ‘식구’랄 수는 없다. 최근 한국 가정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가족 간에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풍조가 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된 이민 생활 속에서도 6남매를 모두 예일대와 하버드대에 보내 미국 최고 엘리트로 키운 전혜성(77) 여사도 최근 자녀 교육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 식사는 가족이 함께했다”며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7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이 늦게 귀가하는 가장을 위해 아랫목이나 장롱의 이불 속에 밥을 묻어 두곤 했다. 밥의 온도는 곧 사랑의 온도였다. 느닷없이 비 오는 밤 버스 정류장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가장을 기다리던 가족이 또 얼마나 많았는가. 자식이 아무리 술에 취해 늦게 들어와도 어머니는 속 버리지 말라며 뜨끈한 국과 따뜻한 밥을 챙겨 주시곤 했다. 요즘 남편이 밤늦게 들어와 아내에게 밥상 차리라고 했다간 “이 시간까지 밥도 못 먹고 어딜 돌아다니느냐”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그런 ‘고개 숙인’ 아버지를 향해 아내와 자식들이 “해준 게 뭐 있느냐”고 따지고 들 때도 있다. 아내와 자식이 가장의 위압적 언사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고 하지만 가장 또한 가족이 던진 무심한 투정 한마디에 피멍이 들 때가 있다. 단지 말을 하지 않고 지낼 뿐이다.

    언젠가 법정 스님의 법문(法門)을 듣고 무릎을 쳤다. “요즘은 집 밖에서 태어나 돌 회갑 칠순 잔치까지, 심지어 죽음까지도 집 밖에서 맞습니다. 이런 실상에서 집은, 가정은, 가족은 내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 이제 우리에게는 생가(生家)라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병원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죽는다. 조상과 부모의 체취가 어려 있는 방도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첫아이 돌떡도 손수 장만하지 못해 집 대신 호텔로 손님을 초대한다. 가족 잔치는 사실상 ‘흥행 이벤트’로 변질돼 버렸다. 가족과 가정의 해체는 결국 ‘식구의 소멸(消滅)’과 ‘집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대와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가급적 한집에서, 애견보다는 식구들과 ‘지지고 볶는’ 여생(餘生)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