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란에 이 신문 홍찬식 논설위원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국 지성사에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묵직한 존재감을 지닌다. 그는 학자로서 현실에 당당히 맞서는 삶을 살아왔다. 1965년 서울대 교수가 된 그는 경제사를 전공하면서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으로 확신했다. 한국의 사회구조와 역사 전개 과정을 분석한 뒤 내린 결론이었다.

    “자본주의가 붕괴되면 갈 길은 사회주의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책을 읽게 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 것을 권유했지요” 그래서 한때 ‘학생운동의 대부’로 통했다. 현 집권세력 안에도 그의 제자가 많다.

    그의 ‘사회주의자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1980년대 초였다. 예측대로라면 1970년대 말 박정희 체제가 무너진 뒤 당연히 한국의 자본주의도 같이 몰락했어야 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통치력에 훨씬 못 미치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한국경제는 흔들리기는커녕 승승장구했다.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눈앞의 현실에 그는 낭패감과 함께 충격에 휩싸였다.

    어느 날 서울대 도서관에서 외국 학술지를 읽던 중 논문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나카무라 사토루 라는 일본 학자가 쓴 ‘중진(中進)자본주의’에 대한 글이었다. “나카무라는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지요. 1960년대 이후 아시아에서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들이 등장하면서 자본주의는 실질적으로 세계적인 것이 됐다는 겁니다” 나카무라는 1980년대 초에 이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었다.

    안 교수의 발걸음은 일본으로 향했다. 마침 도쿄대의 교환교수 제의가 와 있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10년 가까운 각고 끝에 그는 한국 사정에 맞게 보완한 새 중진자본주의론을 내놓는다. 그리고 “연옥(煉獄)을 통과하는 지적 고뇌 끝에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실효성을 인정한다”고 선언하며 우파로 전향했다. “연옥을 통과하는 고뇌란, 엊그제까지 동료나 제자였던 좌파 학자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데 대한 인간적 괴로움을 표현한 것이었지요. 입장을 바꾼 데 따른 개인적 수치심은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는 먼저 노동현장에 투신한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다. 자신의 권유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학술 논쟁이었다. 그는 종속이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등 당시 좌파이론과 정면 대결했다.

    논쟁이 이어지면서 나중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복잡한 이론을 제쳐 두고 한국경제가 과연 발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좌파 학자들은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후 한국 근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열중했다. 각종 통계와 자료를 분석한 끝에 한국의 근대화는 국제관계를 통해 이뤄졌다고 단정했다. 좌파가 주장하는 정치의 자주, 경제의 자립, 군사의 자위라는 목표는 한반도 역사상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허구라는 것이다. “한국의 자유와 번영은 국제관계 속에서 개발과 협력을 통해 이뤄진 것이므로 앞으로도 국가의 활로를 그쪽에서 찾아야 합니다”

    올해로 만 70세인 그는 최근 허리 수술을 받았다. 외출이 불가능한 형편이었지만 일주일 뒤 뉴라이트재단 발족식에 참석했다. 일본 생활(후쿠이대 교수)을 정리하고 귀국해 뉴라이트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은 것이다.

    학자로서 자신의 잘못된 이론을 순순히 인정했고, 치열하게 대안을 찾아 헤맸으며, 좌파 정권 아래에서 뉴라이트 진영의 선두에 선 노학자에게 열정의 근원을 물었다. “외람된 얘기지만 동포가 잘사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할 것 아닌가”라고 답한다. 그 선비적 용기와 양심, 실천적 자세는 요즘 누구에게도 찾아보기 어렵다. 우파가 좌파에 내줬던 지적 헤게모니를 되찾는 데 그의 강직한 행보가 큰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