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 '중앙포럼'란에 이 신문 안희창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5년 8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제정치, 북한 전공 학자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활발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지다 몇몇 참석자가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던졌다고 한다. '외교 현안에서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통령이 먼저 공개적으로 언급해 버리면 뒷감당이 어려워진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핵이 자위수단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는 대통령의 LA 발언과 동북아균형자론 등을 염두에 둔 고언(苦言)이었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청와대 당국자가 나섰다. "학자분들의 그런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국민에게 물어보면 정부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후 분위기는 썰렁해지고, '문제발언'은 사라졌다고 한다. 사회자의 의중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대통령과 외교안보 참모들이 '자주'의 기치하에 입안한 정책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

    자신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 견해에 대해선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게 이 정권의 특징 중 하나다. 그러니 사회자의 이런 발언도, 경우는 없지만 그러려니 하고 치부하자.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한 가지 있다. 코드가 맞는 자신들끼리는 어떠했느냐는 점이다. 이른바 '자주파'끼리도 당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였음이 청와대 비밀문건 유출 사건으로 백일하에 드러났다. 다른 전문가들의 견해에는 귀를 막으면서 자신들끼리도 아옹다옹했으니 실행력 있는 단단한 외교정책이 수립될 리 만무했다. 뭔가 대단한 국제정치학상의 이론인 것처럼 내세웠던 동북아균형자론이 몇 개월도 못 가 유야무야된 게 단적인 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도 '외교라인의 내부 분란'으로 아까운 시간만 낭비한 측면이 있다. '잃어버린 외교 3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평가받을 대목도 있다. 한·미 관계의 근본 기조를 '평등한 쌍무 관계'로 바꿔 보려는 시도나, 용산 미군기지 이전 등 해묵은 현안들이 해결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문제는 우리의 역량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자주'라는 이념에 지나치게 몰입했다는 점이다. 분쟁 해결을 위한 독자적인 강력한 수단이 결여된 국가가 이런 행태를 보이니 그 노선이 제대로 구현될 수 없을뿐더러, 주변 국가와 공연한 불협화음만 자초한 것이다.

    전 세계에서 자주를 외교노선으로 선언한 국가는 우리와 북한밖에 없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자주를 '신주 모시듯이' 했던 북한이 지금 어떤 처지에 빠져 있는지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북한이 자주노선을 택한 것은 당시 사회주의 양대 거두(巨頭)였던 중국과 소련 간의 분쟁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런데 우리 주변 상황은 어떠한가. 전통적 우방인 미국과 일본은 '찰떡궁합'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미국과 중국 관계도 우호적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외교기조의 원칙이 새롭게 조정돼야 한다. 무엇보다 '자주'라는 명분보다는 '국익'이라는 실리가 외교 화두로 자리 잡아야 한다. 또 '외교부의 노사모'니 '자주파 간의 갈등'이니 하는 소음이 나오지 않도록 외교 라인도 재정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장관급인 송민순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북한 전공'의 이 장관과 '대미(對美) 협상통'인 송 실장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런 변화를 일궈낼 수 있느냐가 우리 외교의 성패를 가름하는 시금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