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4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석환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달 21일 러시아에선 군용·민수용 항공기 제작사를 모두 통합해 하나의 거대 국영항공사를 만드는 법안이 통과됐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선 '두바이 포트 월드'사가 미국의 항구 5개의 운영권을 사들이는 계약이 국가안보 이슈로 비화하면서 워싱턴 정가가 중심이 돼 이를 뒤집으려는 시도가 벌어졌다. 또한 프랑스에선 이탈리아의 에너지 기업 '에넬'이 프랑스 민영 에너지 기업 '쉬에즈'를 인수하려 하자 프랑스 정부가 가스공사를 동원해 거대 국영 에너지 기업을 탄생시켰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모두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소위 '전략적'이고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산업 부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가가 개방과 자유로운 자본의 흐름을 통제했다는 점에선 성격이 같다. 특히 미국은 시장경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대테러전쟁의 콘텐트로 삼아 세계에 확산하는 나라다. 그러다 이번에 경제 애국주의라는 새로운 안보논리를 들고 나온 것이다.

    '두바이 포트 월드'사가 사들인 미국 내 5개 항만의 본래 운영권은 영국 회사의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정치인들은 항만을 아랍계 회사가 통제하는 게 중요한 안보 이슈라며 이 계약의 무효화를 촉구하고 있다. 민심도 반대 일색이다.

    지난주 모스크바와 독일에서 만난 학자들은 이 사태가 결국 미국적 보수 애국주의, 국가주의 경제논리일 뿐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두바이 포트 월드'사가 소속된 아랍에미리트는 중동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가장 협력적인 나라다. 그런 나라를 안보에 위협적이며 미덥지 않은 세력으로 보는 인종·지역 차별적 태도는 미국이 외치는 가치와 이율배반적인 것이며, 미국의 세계 지도력 및 개방경제체제에 대한 위협이다.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이뤄진 일들도 우리에게 보호주의와 개방경제체제, 안보와 경제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 러시아의 국영항공기 제작사 통합 법안은 푸틴 대통령이 에너지 부문의 재(再)국유화에 이어 소위 전략산업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려는 조치의 하나다. 물론 러시아 항공산업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푸틴의 결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재 러시아 항공산업은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민수용 항공기 수주가 사실상 단절된 상황에서 지금까지 이 산업을 유지시켜준 것은 군용기 수출이었다. 그렇지만 군용기 수출 시장도 인도와 중국에 과잉 의존하고 있다. '미그' '일류신''투폴레프' 같은 역사적 항공기 제조사들은 자금난을 탈피하고 신규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보잉, 에어버스 같은 외국 자본과 합작계약을 체결해 기술 이전 및 교류에 나서고 있다.

    푸틴의 결정은 이러한 시점에 이뤄졌다. 당연히 서구에선 이를 좌파 민족주의, 좌파 사회주의, 국가 사회주의적 결정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두바이 포트 월드사의 계약을 놓고 미국에서 벌어진 논란은 이러한 비난에 대한 정당성을 약화시킨다.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영 가스회사를 동원한 에너지 기업 쉬에즈 합병은 분명 개방경제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반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프랑스의 이런 애국주의적 조치는 처음이 아니다. 인도계 미탈스틸이 프랑스·룩셈부르크·스페인 합작 철강회사 아르셀로를 인수하려하자 대통령까지 나서서 반대하고 있다.

    개방경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미주와 유럽에서 경제 애국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자본주의의 원칙과 개방경제의 장점에 대한 확신은 약화된다. 전략 분야에 대한 보호와 경제 애국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순진한 보호론이나 순진한 개방론은 모두 정답이 될 수 없음을 세 사례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