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7일자에 이 신문 홍준호 선임기자가 쓴 정치 분석 '한나라 속 두나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쪽의 한 핵심 의원은 얼마 전 이런 말을 했다. “한나라당에는 들판형 투쟁가들이 너무 없다. 하루빨리 들판형 투쟁가들이 들어와서 노무현 대통령은 비판하지 않고 당내 비판만 하는 이른바 소장파란 사람들을 대체해줬으면 좋겠다.” 그가 당내 비판만 하는 소장파의 대표격으로 꼽은 건 원희룡 최고위원이다. 사학법 무효화 투쟁을 주도해온 박 대표가 자신의 장외투쟁을 공개 비판한 원 최고위원을 향해 직접 화를 낸 일도 있었다. 이에 원 최고위원이 속한 수요정치모임 소속의 한 의원은 “한나라당에는 대표가 뭐라고 하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줄 아는 모범생뿐이다. 다른 각도에서의 야생마들이 절실하다”고 되받았다.

    사학법 투쟁이 길어지고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한나라당 내부의 분화(分化)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투쟁 노선에 대한 차이가 차기 대선주자들에 대한 선호도와 맞물리고, 이런 분화가 각 진영의 노선 차이를 더욱 가속화하는 흐름이다. 

    지난 12일 서울 정동 배재빌딩에서 뉴라이트 세력이 연 토론회에 한나라당 인재영입위원장인 김형오 의원이 참석했다. 뉴라이트 양대 세력인 뉴라이트 전국연합의 유석춘 공동대표, 자유주의 연대의 신지호 대표와 나란히 발제를 한 김 의원은 뉴라이트에 대한 기대를 이렇게 나타냈다. 

    “한나라당이 한달 이상 사학법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는데도 저쪽은 눈 하나 깜짝 않는다. 보수는 그동안 색깔론만 나오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이젠 저쪽이 사상전(思想戰)으로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응전하고 제압해야 한다. 행동력이 필요하다. 그런 일에 여러분이 중심이 되어주길 감히 부탁드린다.” 

    박 대표를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지도부가 뉴라이트의 노선과 활동에 관심을 보여온지는 이미 꽤 됐다. 박 대표측이 당내 소장파 대체용으로 거론하는 들판형 투쟁가도 바로 이들이다. 박 대표는 사학법 투쟁을 자유민주체제와 국가 정체성을 수호하는 차원이라고 말한다. 뉴라이트의 유석춘 공동대표도 한나라당을 향해 “사학법을 비롯한 4개 입법, 시장 경제 등에서 우파로서의 정체성을 선명히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는 ‘자유주의와 애국적 세계주의로 무장한 뉴라이트’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한다. 양측은 향후 정세를 ‘폐쇄적 민족공조세력 대 선진 글로벌 세력’ ‘큰 정부 대 작은 정부’ 등의 대결로 보는 점에서도 빼 닮았다. 

    한나라당은 과거 김영삼 총재 시절 재야운동권을 영입하고 이회창 총재 시절 개혁공천을 통해 소장파들을 키웠다. 이들을 당의 외연을 넓히는 ‘보완재’로 활용했다. 

    두 차례 대선에서 진뒤 한나라당에서는 한동안 더 중도로 가야 한다는 논의가 무성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죽을 쑤면서 이런 논의는 수그러들고 당대표 진영에서 ‘원희룡 대신 신지호’란 쪽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한나라당이 박 대표의 뜻대로만 굴러가지는 않는다. 12일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명박 서울시장과 가까운 이재오 의원이 박 대표측의 김무성 의원을 22표란 비교적 큰 차이로 이긴 결과가 이를 보여준다. 

    박 대표측 노선을 앞장 서 비판한 것은 소장파들이다. 수요모임의 박형준 의원은 박 대표의 ‘정체성 투쟁’에 대해 “좌파쪽이 매사 딱지를 붙여 매도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도 국가적 재앙이지만 한나라당이 역으로 그런 전술을 따라가는 것 역시 또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뉴라이트의 활동에 대해서도 박 의원은 “자유민주주의를 너무 경직되게 해석하면 곤란하다”고 비판하고, 원 최고위원은 “뉴라이트의 편 나누기 전술은 한나라당의 외연을 넓히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당내에서 소수이고, 이전보다 더 입지가 줄어들었음을 스스로도 부인하지 않는다. 심지어 2007년 대선국면에서 한나라당과 뉴라이트가 손을 잡을 경우 자의든 타의든 떠날 수밖에 없는 쪽은 원희룡 계열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더 큰 변수는 박 대표의 강력한 경쟁자인 이명박 서울시장이다. 이시장도 뉴라이트쪽과 교감하고 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의 김진홍 목사와는 개인적 친분이 두텁다. 그러나 이 시장쪽에는 뉴라이트의 이념 일변도 노선과 그들의 자생력에 대해 물음표를 제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시장과 가까운 정두언 의원은 “뉴라이트가 힘을 가지려면 라이트가 아니었다가 라이트가 된 진짜 뉴라이트가 많아야 하는데 아직은 과거 라이트였던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다”고 말한다. 다음 대선은 노 대통령이 아니라 범 여권의 새로운 후보와 싸우는 것이고, 범여권의 후보가 정동영, 김근태가 아니라 고건, 정몽준, 혹은 또다른 후보가 될 수 있으며, 다음 대선 역시 51대49의 게임이 될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집토끼를 단속하는 것 못지않게 산토끼를 잡는 유연한 전략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시장쪽이 사학법 투쟁 과정에서 ‘몸은 박 대표쪽과 같이 하되 마음으론 거리를 두는’ 전략으로 나선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 대선은 좌우의 문제보다 누가 더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일을 해내는데 적합한가를 가르는 선거가 될 것’이라는 게 이 시장쪽의 시각이다.

    이 시장측은 앞으로 박 대표를 상대로 유연성을 앞세운 전략을 더 세게 밀고 나갈 것이다. 박 대표측 역시 정체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서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노선을 더욱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박 대표의 측근인 전여옥 의원은 “사학법 투쟁에서 이기든 지든 분명한 승부가 나야 한다. 만의 하나 이번에 지더라도 지려면 확실하게 져서 보수세력이 반성하는 계기를 만드는 게 2년 뒤를 위해서도 좋다”고 말한다. 좌파와의 투쟁 전선, 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이런 저런 연대를 통해 당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구시대적 발상이라고도 말한다. 박 대표의 비서실장을 지낸 유승민 의원 역시 “박 대표는 담백하게 나갈 것이고 길게 보면 이 시장쪽과 좋은 승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원내대표 경선이 이재오 의원의 낙승으로 끝난 이면에는 박 대표의 사학법 투쟁 노선을 당론으로 따르던 중간파 의원들 상당수가 막판에 방향을 튼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박 대표의 ‘담백한 뉴라이트 전략’이 앞으로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되돌려놓을 수 있느냐 여부를 추적하면 한나라당 경선 게임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