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 '조선테스크'에 이 신문 신정록 정치부 차장대우가 쓴 '정의와 기회주의의 차이'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노무현 돌풍의 제도적 진원(震源)이었던 ‘국민참여경선’의 지적재산권자는 김근태 의원이다. 김 의원은 1996년부터 이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또 한 사람의 적극적 찬성자는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대 입장이었다. 제도 도입이 결정된 직후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참모진 보고에 대한 노 대통령의 반응은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등산화(조직)와 돈을 이길 수 있겠느냐. 정치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라고 말했다 한다. 선거인단 규모가 확대될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노 대통령은 주변을 탐문한 뒤 해볼 수 있다는 자신이 서자 열흘쯤 뒤에 입장을 바꿨다.

    노 대통령이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지 한참 후인 2002년 8월. 8·8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한 뒤 지지율이 15% 안팎으로 떨어지고 당내에서는 후보 교체 움직임이 구체화되던 시기였다.

    당시 여의도 민주당사 8층, 기자가 공보특보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노무현 후보가 들어와서 담배 한 대를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묻지도 않은 얘기를 했다. “내가 말이죠. 당선이 안 돼도 선거 후에 당을 하나 만들 거예요. 그러면 우리 당 후보들이 당선 안 될지 몰라도 저 사람들(후보 교체론자들)은 모두 떨어뜨릴 수 있어요.” 자신을 후보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적의(敵意)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노 후보는 깜짝 놀라는 기자에게 “이건 쓰지 말아요” 한마디를 더 하고 방을 나갔다.

    명분과 원칙을 그렇게 좋아하는 노 대통령도 때로는 이해타산을 잣대로 상황을 돌파하고, 때로는 감정에 젖어 상황에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요즘 노 대통령은 이런 과거를 잊은 듯하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보따리 장수’에 비유하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기웃거리는 정치’나 한다고 비판했던 노 대통령은 이제 열린우리당에 그나마 남아 있는 대선 후보라 할 수 있는 정동영·김근태 두 사람을 정면 공격하기 시작했다. 노선도 가치관도 없는 사람들, 구멍가게도 못 맡길 사람들이라고까지 비난한다.

    이유는 한 가지다. 열린우리당으로 정권을 운영했으면 그 책임을 져야지 당을 뛰쳐나가 얄팍하게 대선 후보가 되어보려 한다는 것이다. 기본이 안 돼 있다는 얘기다. 거칠고 모질어서 그렇지 말인 즉 그르지 않다.

    하지만 내가 하면 현실적 판단이고 남이 하면 기회주의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노 대통령이 그렇게 매도해버린 손학규·정동영·김근태·정운찬 같은 사람들이라고 왜 노선이 없고 가치관이 없겠는가. 노 대통령이 여러 번 얘기한 ‘시대정신’을 읽는 힘이 그들이라고 왜 없겠는가.

    청와대는 3일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민주당, 국민중심당에 대해 “한나라당 주도의 ‘야권 공조’에 참여하거나 한나라당의 국정 발목 잡기에 침묵함으로써…”라고 했다. 대통령의 대연정 시도는 정치 발전을 위한 것이고 소수 정파의 생존책은 기회주의가 되는 것인가.

    정의를 독점하려는 의식은 결기를 키워 반독재 투쟁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정의를 독점하려 하면 나머지는 모두 소인배가 되어버린다. 독선과 오만은 거기서 싹튼다. 그래서 대통령 한마디에 졸지에 소인배가 되어버린 김근태 전 의장은 3일 “지지율 좀 올랐다고…”라는 말까지 해버린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제 남의 정의도 정의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이 만드는 역사도 한 번 지켜보는 게 순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