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한미 정상회담 전 협상 타결 가능성 낮아투자 방식, 원자력 협정 개정 등 협상 과제 산적野 "덜컥 3500억 달러 정한 7월 합의가 원죄"
  • ▲ 이재명 대통령과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지난 8월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결단의 책상'에 앉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악관
    ▲ 이재명 대통령과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지난 8월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결단의 책상'에 앉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악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의 관세 협상이 지루한 줄다리기로 접어든 모습이다. 3500억 달러(약 504조 원) 대미 투자 방식을 두고 한미 당국이 이견을 보이는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 담판이 없이는 '도돌이표 협상'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4일(현지시간) 아시아 순방길에 오르며 '이번 방문에서 한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할 것으로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타결에 매우 가깝다. 그들(한국)이 (타결할) 준비가 된다면, 나는 준비됐다"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언뜻보면 협상 타결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 대통령실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견지했다. 

    대통령실은 26일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해 "한미 관세협상의 조속한 타결을 희망하는 원론적 발언으로 이해한다"면서 "한미 관세협상과 관련해 밀도 있게 협의를 진행 중이지만 구체적인 타결 시점은 확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미 당국은 일부 협상에서 진전을 보였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분석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24일 미국 출장 후 귀국하면서 "일부 진전은 있었지만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양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오는 29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관세협상이 마무리될 가능성도 낮게 봤다. 그는 "추가로 대면 협상을 할 시간은 없다. APEC은 코앞이고 날은 저물고 있어서 APEC 계기 타결을 기대한다면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이런 모습은 이 대통령의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이 대통령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관세협상을 하겠다는 기조를 여러 차례 밝혀 왔다. 이 대통령은 지난 23일 미국 CNN과 인터뷰에서 "양국의 입장을 조정·교정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고 밝혔다. 관세협상이 안팎으로 녹록지 않다는 것을 내심 드러낸 것이다.

    한미의 가장 큰 이견은 '투자 방식'에 있다. 지난 7월 30일 1차 관세협상에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은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를 진행하기로 했다. 

    미국은 3500억 달러를 전부 현금으로 선불 투자하라는 입장을 내놨다. 우리 정부는 국가 경제 규모와 외환시장 충격 등 부작용이 크다는 입장을 보이며 '분할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맞섰다. 

    미국도 분할 투자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연 250억 달러 수준의 현금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150억 달러 이하로 투자를 제한하는 방식을 협상 카드로 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협상 테이블에는 투자 방식뿐 아니라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권한'을 둔 원자력 문제도 함께 부상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식 권한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원자력 시설의 운용 범위와 절차를 사전에 미국과 협의하고,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독자적으로 농축과 재처리를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현재 사안별로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미국 이외의 국가와 핵 협력을 추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부는 소형모듈원자로(SMR)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평화적 범위 내 농축 권한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 ▲ 관세협상 후속 협의를 위해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했던 김용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2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 관세협상 후속 협의를 위해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했던 김용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2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미국은 한국에 대해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권한을 부여하면 세계의 다른 국가가 연달아 이를 요구하는 '핵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국내에서 계속되는 '핵무장론'에도 불을 지필 수 있다. 

    양국 간 조선산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로 관세협상의 승부수를 던졌던 정부는 원자력 협력안인 '마누가'(Make America Nuclear Cooperation Great Again)를 협상 카드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원전 협력이 조선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보다 시너지 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제안을 통해 미국의 마음을 흔든다는 계획이다. 

    협상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사실상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리는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에서 합의문을 도출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집권 세력인 공화당 인사들에게 이재명 정부가 별다른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야당에서 나온다. 이미 지난 8월 두 정상의 정상회담 직후 정부가 보여줬던 모습에 대한 불신도 존재한다. 

    실제 지난 8월 정상회담 이후 대통령실은 "합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된 회담"이라고 밝혔지만, 관세협상 합의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야당에서는 정부가 성과를 부풀리며 대국민 거짓말을 했다며 비판했다.

    경쟁 국가들과도 협상 모양새가 다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과 EU(유럽연합)가 지난달 관세협상을 마무리하면서 세율 15%를 적용받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등에서 25%의 세율을 부과받고 있다. 철강 부문은 세율이 50%다.

    3500억 달러 외에 미국 에너지 구매(1000억 달러)와 기업 투자(1500억 달러)가 더해지면 사실상 한국의 부담은 다른 국가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금 정부가 협상의 어려움을 겪는 근본적인 원죄는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를 덜컥 약속한 7·31 졸속 합의에 있다"며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까지 어떤 것도 합의된 것이 아니라는 외교가의 오랜 격언을 망각한 참담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이어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우리나라 GDP를 고려했을 때 우리 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지우게 된 협상 실패이자 외교 참사라고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