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장면.ⓒ한국문화예술위원회
    ▲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장면.ⓒ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여성 노학자 파우스트(국립극단 '파우스트'),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여자 살리에리(연극 '아마데우스), 포조의 노예 럭키(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여행 안내자 월하(뮤지컬 '광화문연가')…남성 캐릭터는 남성이, 여성 캐릭터는 여성이 연기하는 이분법적 고정관념의 시대는 지났다.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프리(gender-free)', 성을 뒤바꾸는 '젠더벤딩(gender-bending)' 등 공연계 다양한 젠더 실험은 2024년에도 계속된다.

    ◇ 집착에 눈 먼 자들이 벌이는 막장 드라마

    지난 2~4일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공연한 '남성창극 살로메'는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희곡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냈다. 특히, 기존 원작의 인물 구성을 전부 남성 배우로 바꾸고 김준수·윤제원이 요부 '살로메'를 연기했다. 남성 소리꾼들이 여성 역할까지 모두 맡아 무대를 채우는 창극은 처음이다.

    광기와 에로티시즘의 상징인 '살로메'는 성서에 나오는 헤롯왕과 그의 의붓딸 살로메, 당대의 예언자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그린다. 요한에게서 사랑을 거절당한 살로메가 그의 머리를 얻기 위해 헤롯 앞에서 몸에 걸친 7개의 베일을 차례로 벗으며 추는 '일곱 베일의 춤'과 은쟁반 위에 놓인 요한의 머리에 키스를 하는 장면 등이 유명하다.
  • ▲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장면.ⓒ한국문화예술위원회
    ▲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장면.ⓒ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번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한 김시화의 첫 창극 연출작으로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이 각색을, 디자이너 이상봉이 의상에 참여했다. 김시화 연출은 '살로메'를 남성창극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개인적으로 예술적 측면에서 성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고, 앞으로 더 허물어질거라 생각한다. 전통공연 안에서 이런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탐미적이고 인간의 본성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끌렸다. 도발적이고 원색적이지만 각색이 되면서 주는 교훈히 확실했다. 인물들 하나하나의 서사와 그들의 절규가 우리 소리와 맞닿고 어울리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김 연출은 "극중 인물들은 욕망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집착이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허망함과 공허함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라며 "노래 중에 '빨간 달이 검은 우물 속에'라는 가사가 있다. 악하고 기형적인 이런 욕망들이 모두 사라지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전했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는 "모든 인물이 검은 우물에 내던져져 파멸하는 서사는 원작이 갖고 있는 '달'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시각화한 무대와 잘 맞아 떨어졌다. 인물들의 욕망이 토해내고 뱉어내는 창극적 발성과 만나 강렬함을 더했다. 고선웅 대본은 욕망 중심으로 전개되는 극적 갈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고 평했다.
  • ▲ 연극 '햄릿' 공연 장면.ⓒ국립극단
    ▲ 연극 '햄릿' 공연 장면.ⓒ국립극단
    ◇ 햄릿, 검투에 능한 덴마크 공주가 되다

    영화 '철의 여인'의 감독인 영국 연출가 필리다 로이드는 '줄리어스 시저'(2012), '헨리 4세'(2014), '템페스트'(2016) 여성 배우만의 셰익스피어 3부작을 무대에 올렸다. 2017년 영국 로열셰익스피어극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미셸 테리는 소수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성별·인종·장애 유무에 상관없는 젠더블라인드(gender-blind) 캐스팅을 시도했다.

    배우 이봉련이 해군 장교 출신의 덴마크 공주 '햄릿'으로 돌아온다. 국립극단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정진새 각색, 부새롬 윤색·연출)을 7월 5~29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인다. 2020년 제작 당시 이봉련을 '햄릿'에 캐스팅해 화제가 됐으나 팬데믹 여파로 온라인 극장을 통해서만 몇 차례 공개된 바 있다. 

    원작의 남성이었던 왕위 계승자 햄릿을 여성으로 바꿨으며, 햄릿의 상대역인 오필리어는 남성으로 변화시켰다. 길덴스턴, 호레이쇼, 마셀러스 등 햄릿의 측근들에 적절히 여성을 배치해 공연을 보는 관객이 역할의 성별을 의식하지 않고, 각 인물을 단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이봉련은 이 작품으로 제5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그는 "햄릿이라는 역할 자체가 오랫동안 많은 배우에 의해 무대에 올라온 위대한 희곡인 만큼 부담은 기본적으로 있었다. 공연을 하기로 결정을 했을 때 제가 원작에 짓눌릴 것 같은 겁도 나서 국립극단의 각색본을 먼저 읽고 원작을 정독했다"고 말했다.
  • ▲ 뮤지컬 '데미안' 2023년 공연 장면.ⓒ낭만바리케이트
    ▲ 뮤지컬 '데미안' 2023년 공연 장면.ⓒ낭만바리케이트
    ◇ '젠더프리' 이상의 개념, '캐릭터프리'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대표하는 구절이다.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던 작품으로, 10살 소년이 20살 청년이 되기까지 고독하고 힘든 성장의 과정을 그린다.

    오세혁 작가와 다미로 작곡가가 호흡을 맞춘 뮤지컬 '데미안'이 2020년 초연, 2023년 재연에 이어 4월 8일~6월 30일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4관에서 삼연을 펼친다. 한 배우가 고정 배역 없이 회차에 따라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오가는 '캐릭터프리' 형식의 독특한 2인극이다. 

    원작의 설정과 다른 성별의 배우가 정해진 성 구분을 따르지 않고 인물을 연기하는 '젠더프리' 공연이기도 하다. 전쟁의 폐허에서 죽어가는 젊은 군인 싱클레어가 어둠 속에서 데미안과 마주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원작에서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에 관한 대화, 싱클레어가 참여한 전투 등을 무대로 구현했다.

    오세혁 작가는 캐릭터프리 캐스팅에 대해 "우리 마음 속에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모두 담겨 있기에 두 인물을 연기해야 비로소 연기가 완성되는 것"이라며 "배우는 언제나 여러 얼굴로 살아가는 삶이라서 어쩌면 배우 자체가 싱클레어와 데미안이라고 생각했다. 이 공연을 통해 배우가 가진 모든 얼굴을 꺼내보고 싶었다"고 했다.
  • ▲ 배우 차지연이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를 연기하고 있다.ⓒPAGE1
    ▲ 배우 차지연이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를 연기하고 있다.ⓒPAGE1
    ◇ 다양한 젠더프리 개념

    성역을 초월하는 젠더프리 캐스팅에는 그 방식이나 캐릭터 성격에 따라 구분되는 여러 개념이 있다. '더데빌:파우스트'는 'X-Black' 역할에 배역의 성별을 정해놓지 않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연극 '아마데우스'는 2020년 재연부터 '살리에르' 역에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젠더블라인드' 캐스팅을 시작했다. 뮤지컬 '마틸다'의 '트런치불'은 배역과 다른 성별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젠더크로스 액팅'에 속한다.

    2018년 이후 한국 공연계에서는 페미니즘적 관점의 성장에 따라 남성 배역을 여성 배우가 맡는 젠더프리 캐스팅이 활발하다. 하지만 남녀 배우가 한 역할을 번갈아 연기하는 것도 젠더프리, 남성 배우가 연기하던 작품의 여성 배우 버전이 나와도 젠더프리라고 한다.

    이에 최승연 평론가는 "젠더프리는 젠더리스(genderless)라는 용어와 함께 패션계에서 먼저 사용됐다. 이는 '젠더에 구애받지 않는, 젠더에 자유로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공연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면 특정 배역이 '젠더에 자유로운', '성별이 전혀 없는' 혹은 '무성성'이라는 의미가 된다"며 "캐릭터의 젠더를 바꾸는 양상은 '크로스젠더(cross-gender)'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공연예술은 동시대를 세심하게 반영해왔다. 크로스젠더 액팅 공연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상은 젠더 감수성이 변화되고 젠더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현재를 반영한 것이다. 다만, 단순히 성(姓)을 바꿔 공연함으로써 흥미적 요소를 더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된다면 이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