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서 노환으로 별세… 향년 94세유럽 최고의 작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16편 남겨
  • ▲ 프랑스 파리에서 작고한 작가 밀란 쿤데라. ⓒ연합뉴스(민음사 제공)
    ▲ 프랑스 파리에서 작고한 작가 밀란 쿤데라. ⓒ연합뉴스(민음사 제공)
    인생에 무게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무거운 인생과 가벼운 인생 중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일까?

    삶에서 가치를 우선시한다면, 그건 무거운 인생일 것이다. 반대로 재미를 먼저 따진다면, 그건 가벼운 인생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볍게 사는 것과 무겁게 사는 것, 어느 것이 더 잘사는 것일까? 아니, 어느 것이 더 잘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당신이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다면, 그리고 선택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12일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2023)는 자신이 공인한 16편의 작품을 통해 이 같은 질문을 줄기차게 던졌다.(쿤데라는 자신이 쓴 것과 다르게 번역됐거나 편집됐다는 이유로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재검토했다. 그리고 소설 11편과 희곡 1편, 평론 4편 등 16편만 자기 작품으로 인정한다고 스스로 ‘공인’했다.)

    현실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끔찍할 정도로 모호하다


    이 세상은 상대적으로 이뤄진 음양(陰陽)의 세계다. 낮과 밤, 플러스와 마이너스, 남성과 여성, 여름과 겨울, 이익과 손해, 옳음과 그름, 가벼움과 무거움….

    모든 것이 음과 양의 두 가지로 양분돼 있으니, 세상 일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딱부러지게 구분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선과 악의 경계는 끔찍할 정도로 모호하다. 

    모든 것이 옮음과 그름 사이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고, 그래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진실은 언제나 이것과 저것이 뒤섞인 미지근한 중탕이다. 그래서 재미가 없고, 눈길을 끌지도 못한다. 엄연하게 존재하지만, 아무도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는 진실이 있지만, 이 세상에 진실은 없다. 이런 세상에서 진실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세상에서 진실된 삶을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첫 소절을 듣고 b플랫 음 하나를 수정해준 음악가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Brno) 밀란 쿤데라 도서관의 안나 므라조바 대변인은 “밀란 쿤데라가 오랜 투병 끝에 프랑스 파리에서 숨졌다”고 12일(현지시간) 발표했다. 

    브르노는 쿤데라의 고향이다. 옛 모라비아공국의 수도였던 이곳은 보헤미아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다수인 국제도시다. 쿤데라는 나치 침공기였던 1929년 이곳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본인이 드러내놓고 밝히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쿤데라의 아버지 루드비크 쿤데라는 유명한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의 제자로, 브르노음악아카데미의 학장을 지낸 피아니스트다. 밀란 쿤데라의 피아노 실력은 수준급이었던 것 같다. '르 피가로' 기자였던 알랭 제라르는 그 앞에서 야나체크의 곡을 연주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쿤데라가 도입부 첫 소절을 듣더니 벌떡 일어나서 b플랫 음 하나를 수정해줬다”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귀를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그래서인지 쿤데라의 작품에는 음표나 악보가 뜬금없이 등장하곤 한다.

    그의 작곡 선생 중 파벨 하스라는 유대인이 있었다. 1941년 행방불명된 그는 수년 뒤 나치 선전영화에 등장했다.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마른 몸으로, 넋 나간 수감자들 앞에서 표정 없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 스크린에 비친 것이다.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가스로 사라졌다는 소식에 쿤데라는 경악한다. (파벨 하스의 딸인 올가 하스는 쿤데라의 첫 번째 부인이다.)

    당시 나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가장 큰 무기는 공산주의였다. 쿤데라는 1947년 공산당 청년운동에 가담해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20년간 체험해본 공산주의는 이론과 달랐다. 공산당 특유의 획일성과 강요, 사람을 감시하고 억누르는 통제 시스템에 그는 질식을 느꼈다.

    공산당식 검열 시스템에 저항

    참다못한 그가 비명을 지른 것이 1967년 6월의 체코작가회의였다. 이때까지 체코 공산당은 쿤데라를 ‘친공산당 지식인’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체코 공산당이 검열을 무기 삼아 문화를 억압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과민한 공산당은 회의에 참여한 작가들을 당에서 추방했고, 쿤데라에게는 반체제 인사라는 낙인을 찍었다.

    공산당 검열사무국은 그의 첫 장편소설 ‘농담’을 관찰 대상으로 지정했다. 책 출판이 어려워지자 안토닌이라는 쿤데라의 친구가 ‘농담’의 원고를 프랑스 사람 루이에게 보여줬다. 루이는 유명 출판사인 갈리마르에 원고를 넘겼다.

    ‘농담’에는 공산당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책이 체코에서 출간됐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인 1968년, 체코작가연맹은 이 작품에 작가상까지 수여했다. 당시 최절정에 달했던 ‘프라하의 봄’의 여파였다.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는 그해 가을 출간 예정으로 ‘농담’의 번역본을 준비하고 나섰다.

    이 시기가 쿤데라에게는 짧았지만 행복했던 때로 보인다. 그가 아나운서였던 베라와 만나 두 번째로 결혼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그해 8월20일, 소련의 탱크가 프라하로 밀고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소련은 “우리와 함께 걷지 않는 자는 우리의 적”이라면서 쿤데라의 책들을 도서관과 서점에서 뽑아냈다. 쿤데라는 교수로 재직했던 프라하영화학교에서 1971년 해고됐다. 체코 비밀경찰국(StB)은 그들 부부를 ‘2등급 적’으로 분류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몇 시에 집을 나서서,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했고, 무엇을 먹었고, 어디를 들렀다가, 몇 시에 돌아왔는지 일일이 도청하고 감시해 기록해 놓은 ‘엘리타르(영어로는 elitist)’ 라는 이름의 기밀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엘리타르’ 라는 이름의 기밀 감시문서

    쿤데라는 통제와 감시를 유독 못견뎌했다. 그는 훗날 프랑스의 프랑수아 누리시에 기자에게 “당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체코 공산당은 그가 사라지기를 원했다.

    그는 더이상 조국에서 살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그의 책을 출간한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심사위원 콜레트 뒤아멜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쿤데라는 프랑스 렌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975년이었다.

    프랑스에 정착한 쿤데라는 ‘르 몽드’ ‘누벨 옵세르바퇴르’ 등과 인터뷰·기고를 통해 체코 공산당과 문화 학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체코 공산당은 1979년 그의 국적을 아예 박탈해버렸다. 쿤데라는 국적이 없는 무국적자가 됐다.

    그러자 프랑스 문화부장관 자크 랑이 이 사실에 주목했다. 1981년 대통령에 당선된 프랑수아 미테랑이 ‘프랑스의 똘레랑스(tolérance)’를 강조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1981년 쿤데라에게 프랑스 국적을 부여했다. 쿤데라는 이후 40년 가까이 프랑스 국민으로 살다가 2019년에야 체코 국적을 회복했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권은 여전히 갖고 있었고, 마지막까지 프랑스에서 살다 프랑스 시민으로 세상을 떠났다.

    쿤데라의 모국은 1989년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그의 작품을 터부시했다. 그를 세계적 작가로 만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1984년 영어판·프랑스어판이 먼저 나왔다. 체코어판은 이듬해인 1985년 출간됐지만 여전히 금서 목록에 들어 있었다. 체코 금서 리스트에서 그의 작품이 모두 해제된 것은 1989년이었다.

    프랑스에 정착한 쿤데라는 철저하게 숨어 지냈다. 그는 통제와 감시를 혐오했고, 사생활의 내밀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말했다. 

    “내밀한 것이 밖으로 유출되는 순간, (그것이) 우리의 진짜 존재인 듯 받아들여지기 쉬우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자아는 대단히 유동적이며, 내밀한 것은 우리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가능성, 대개는 실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존재 가능성이다. 우리는 기분에 따라 별의별 생각을 다 하지 않는가? 많은 이들이 차마 뱉을 수 없는 말들을 잠시 가슴에 품었다가 지우며 살지 않는가?”

    내밀함의 가벼움을 경계한 그는 사생활을 추적하는 기자들을 싫어했다. 앞서 언급한 프랑수아 누리시에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쿤데라는 “공산국가에서는 경찰이 사생활을 파괴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자들이 사생활을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수많은 문학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팬들과 만나기를 피했고, 사진 찍기를 한사코 거부했으며, 방송 출연을 일절 하지 않았다. 심지어 파리에 있는 자기 집 문패에는 남의 이름을 적어 놓고 살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자들이 사생활을 위협한다”

    쿤데라의 생애는 무거웠다. 그가 살아온 세상은 음과 양으로 양분돼 있지만,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체코인이었지만 프랑스인이었고, 공산당원이었지만 반공주의자였고, 음악인이었지만 문학인이었으며, 유명인이었지만 무명인으로 지내기를 원했다.

    삶이 무거웠던 그는 항상 가벼운 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가벼운 것도 무거운 것도, 그가 원하던 안식을 주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 이편에 서서 강 건너 저편을 쳐다보고 있는 작가의 분신이다.

    간호사 엘리자베트는 가벼운 사랑을 통해 무거운 사랑을 갈구했고(우스운 사랑들), 물리치료사 루제나는 그녀를 거부하는 가벼운 세계와 그녀가 거부하는 무거운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이별의 왈츠). 가벼운 사랑을 좇았던 의사 토마시는 연인의 무거운 사랑을 짊어져야 했고(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복수에 나선 루드비크는 욕망의 가벼움을 깨닫는다.(농담)

    쿤데라가 창조한 인물들은 자기가 걷지 않은 인생의 다른 길을 바라본다. 그들은 두 개의 삶을 놓고 각각의 무게를 달아보지만, 결코 어느 것이 더 무겁다거나 혹은 가볍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최후까지 가늠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시종 자크는 조롱한다. “그렇군요, 나리. 꼭 돌고 도는 회전목마 같습니다.”(자크와 그의 주인)

    등장인물이나 전개되는 이야기는 다르지만 쿤데라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은 정말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당신은 결정할 수 있는가? 그는 회의한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도,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은 다른 것인가?

    쿤데라는 “딱 한 번뿐이지만, 우리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가? 이제는 내가 물어볼 차례다.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인생을 결정한 적이 있던가? 쿤데라가 체코인으로 태어나기를 바랐을까?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고 싶다고 원한 적이 있었던가? 음악교육을 받아서 문학인이 되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을까? 공산당에 입당했다 출당, 복당, 탈당을 거듭하고 싶다고 간원한 적이 있었을까?

    그는 어느 것도 선택한 적이 없고, 어느 것도 결정한 바가 없다. 아니,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고,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그의 삶은 무거웠고, 그래서 가벼움을 바라봤지만, 그의 삶에는 언제나 무거움과 가벼움이 섞여 있었다.

    그는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무게를 가늠하듯 무거움과 가벼움을 저울질했다. 그러나 그가 관찰한 것은 무거움도 가벼움도 아닌, 두 가지가 모호하게 섞인 어중간함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실토했다.

    “우리는 청춘이 뭔지 모른 채 결혼하고, 노년기에 들어서서도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대지는 무경험의 세계다.”

    그렇다. 인생은 알지 못하는 세계로 걸어가는 것이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어가는 것이다. 무거운지 가벼운지도 모르고, 무겁다는 것이 무엇이고 가볍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냥 걷는 것이다. 안쓰러운 무지체. 자기가 결정한 것이 없는데도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우리는 걷는다.  인생은 일방적으로 살아감을 당하는, 한없이 가벼운 수동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