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JAPAN INSIDE OUT]...진주만 기습 적중미국의 평화주의 일깨워...카이로 선언문 탄생시켜.소련의 공산주의를 세계 최초로 '전체주의'로 규정
  • ▲ 이승만 박사의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 표지. 1941년 8월 뉴욕서 출간.
    ▲ 이승만 박사의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 표지. 1941년 8월 뉴욕서 출간.
    이승만 "맹목적 평화주의는 제5열 간첩"

    80년전 오늘 12월8일(한국시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 날, 이승만 박사의 예측은 적중하였다. 그 4개월 전에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을 출간, “일본의 호전적 천황체제의 침략주의가 산불처럼 미국을 향해 불타들어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 예언은 아시아인으론 처음, 일본을 알고 미국을 알고 세계를 관통하는 글로벌 통찰력의 예광탄이었다. 

    2년전 2차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나치즘과 함께, 소련의 공산주의를 똑같은 전체주의로 규정한 것도 이승만이 세계 최초였다. 그 전체주의 칼날이 자유세계의 심장 미국을 정조준하고 있음을 외면하는 평화주의자들을 향하여 “맹목적인 평화주의는 제5열, 간첩”이라며, 국제정치사상의 새로운 전개와 위기를 누구보다 먼저 분석 제시, 전체주의와의 투쟁을 촉구한 명저이다.

    미국과 일본의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폭로하며 한국의 독립이 세계의 평화와 직결됨을 설파한 이 정치심리학적 저서는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도 읽고 미군의 필독서로 지정되었으며., 2년뒤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을 특별히 약속한 ‘카이로선언’을 탄생시키는 공을 세운다.
  • ▲ 1943년 11월22~27일 카이로 회담 3국대표. 중국 장제스,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 1943년 11월22~27일 카이로 회담 3국대표. 중국 장제스,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장제스, "종전후 한반도는 중국에 달라" 요구

    ◆카이로 선언문에 ‘한국 독립’ 조항이 들어간 것이 ‘김구의 공’이라는 어느 교수의 글은 ‘견강부회’ 일방적 주장이다. 
    카이로회담 개최 4개월전 1943년 7월, 중경의 ‘좌우합작’ 임시정부 주석 김구 일행이 장제스를 만난 것은 “명령대로 좌우합작하였으니 돈 좀 도와달라”는 지원요청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했다는 “중국이 한국 독립을 적극 지지해달라”는 말은 지원금 타내려는 발언인데, 마치 이 말이 카이로 선언문에 반영된 것처럼 주장하는 왼쪽사람들이 많다.

    그날 장제스는 늘 그랬듯이 원론적 지지를 표명하면서 “좌우로 분열된 한인단체들이 계속 일원화 돼야 지원한다"고 되풀이 못 박는다. 한인공산당 병력이 마오쩌둥 편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넉달 후 열리는 카이로회담(1943.11.22~27)을 주제로 삼은 자리도 아니었고 그럴 시기도 아니며 속내를 보여줄 장제스도 아니었다.

    ◆11월23일, 카이로회담 시작 다음날 루즈벨트가 장제스와 단독회담을 갖고 전후책을 타진하였을때 장제스는 마침내 본심을 드러낸다. 
    즉,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이 잘 아는 지역인고로, 일본이 항복하면 중국군이 우선 진주하여 한국독립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요컨대 전후 처리에서 일본영토를 분할할 때 한반도는 중국에게 달라는 요구였다.
    루즈벨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날부터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무슨 결심? 장제스가 지원하는 코리아 임시정부는 ‘중국의 꼭두각시’이므로, 종전 후 한반도가 예전처럼 ‘중국 속국’이 된다면 또 다시 주변국끼리 쟁탈전이 재발할 것이니 그래선 안되겠다는 결심. 
  • ▲ 이승만 박사와 부인 푸란시스카. 이승만이 영문저서를 몇번씩 고쳐쓰는 바람에 부인은 타이핑하느라 손가락이 짓무를 정도였다고.
    ▲ 이승만 박사와 부인 푸란시스카. 이승만이 영문저서를 몇번씩 고쳐쓰는 바람에 부인은 타이핑하느라 손가락이 짓무를 정도였다고.
    ◆카이로선언문 초안을 만든 것은 루즈벨트의 복심 해리 홉킨스(Harry L. Hopkins, 1890~1946)이다. 루즈벨트가 뉴욕지사 시절부터 도움 받은 ‘신앙 동지’였고, 대통령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을 입안 관리하며 상무장관까지 지낸 뒤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최측근이 되어 2차대전을 돕는다. 
    이때 홉킨스도 루즈벨트 부부처럼 이승만의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을 읽는다. 또한 병약한 남편과 달리 활동적인 퍼스트 레이디 엘리너 루즈벨트는 이 책을 읽고나서 ‘기독교국가 미국이 약소민족 코리아를 배신한 부끄러운 역사’를 알게 되자, 노벨상 소설가 펄 벅과 함께 ‘한국 독립’에 적극적인 자세로 변한다.

    처칠은 "한국독립" 반대...전문 삭제  요구...수정

    ◆영국 처칠은 홉킨스의 초안을 보자 격렬하게 반대, ‘한국독립’ 조항을 빼자고 요구하였다. 인도 등 영국식민지에 미칠 영향 때문이란 이유,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주장에 후퇴한 처칠은 그 대신 문구수정에 나서 부분 삭제하고 애매모호하게 바꾸었다.
    최종 발표된 선언문을 보면, 만주와 대만, 남양군도 등의 원상회복을 언급한 다음에 ‘한국 해방 독립’ 조항이 나온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홉킨스의 초안에는 ‘한국인의 노예상태’(enslavement) 앞에 ‘야만적이고 잔인한’ 등의 수식어가 붙어있었으나 삭제된다. 
    가장 문제된 문구는 ‘in due course’(적당한 절차를 거친 시기)이다. 홉킨스가 초안에 쓴 것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이었는데, 이를 처칠이 완강히 반대하여 루즈벨트가 수정한 것이었다.

     ‘in due course’를 본 이승만은 즉각 “강대국들의 흥정”이 숨어있다며 “미국이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준 것 아니냐? 내용을 공개하라”고 펄펄 뛰었다. 그것은 해방 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로 나타난다.

  • 처칠, 6.25때 미국에 일방적 휴전 강요...남북통일 물거품

    ◆‘영국의 위인 처칠’을 존경하는 한국인들이 많지만, 우리역사를 비틀어버린 그의 진실도 알아야겠다. 위에서 보았듯이 사실 처칠은 한반도 독립도 일시적이나마 반대하였고, 나중엔 남북통일도  막은 사람이다. 
    스탈린의 6.25침략전쟁이 터지자 처칠은 초반부터 트루먼에게 즉시 휴전을 압박하였다. 중공군 참전후 맥아더의 만주공격 계획도 ”3차대전 난다”며 반대, 참전중인 영연방국가들과 함께 일방적 휴전을 밀어붙인다. 트루먼은 결국 그해 말 ‘한국전쟁의 주요문제는 반드시  영국과 협의’한다는 협약을 맺었고, 다음해 1951년4월 맥아더를 해임하는 배경의 하나로 작용한다. 

    ★미국이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외교적 보이콧’한다고 선언하였다. 한국정부는 그 중국에 대고 ‘종전선언’을 애걸하고 있다. 
    돈만 된다면 나라도 팔아 넘긴 고종황제 같은 역사의 우물안 개구리들이 지금도 우글거린다. 자유 대한민국이 누구 맘대로 미-중의 흥정 식탁에 올라가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