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소비를 주도하는 MZ세대 역동성… 소비사회 이론으로 분석
  •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어떻게 '고독한 행복'을 누렸을까?

    로빈슨 크루소가 아무런 희망도 없는 무인도에서 매일같이 일기를 쓰며 생활을 기록하고, 고독의 행복감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항아리와 상자에 가득 찬 식량 덕분이었다. 그런 비축이 없었다면 과연 그가 그토록 흐뭇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인류는 오래 지속되는 축적된 더미 위에서만 물질을 초월하는 정신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높은 문화도 이룩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가 사치에서 느끼는 행복감이란 미래에 대비한 비축이 주는 안도감과 쾌감이다. 모든 사치는 미래에 대비한 비축 덕분에 가능하다.

    문명이란 결국 여분의 비축이고, 그 비축이 바로 사치의 기원이다. 그리고 현대의 문명과 사치는 '부(富)의 보편성'과 '정보화'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사치를 비판할 이유도 없다.

    비축이 사치고, 사치가 문화의 근원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다시 읽기 - 명품 소비는 신분상승의 욕구(도서출판 기파랑 刊)'는 2006년 저자가 출간한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를 MZ세대를 겨냥해 다시 쓴 개정판이다. 초판 발행 이후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는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도 아직 나오기 전이었다. 19세기 또는 20세기의 15년이라면 별다른 변화 없는 짧은 기간이었겠지만, 21세기의 15년은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다. 2019년 12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대재앙도 아직 진행 중이다.

    지금 여기 한국에서 'MZ세대'의 분출하는 에너지가 경이롭다. 서울시장선거에서 이미 70% 몰표로 오세훈을 당선시키더니, 여세를 몰아 36세의 이준석을 단숨에 야당 대표로 만들었다.

    MZ세대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 다시 말해 밀레니얼 세대와 그 후 Z세대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들은 몇 년 전부터 가장 강력한 소비세대로 떠올랐다.

    그들은 유난히 운동화에 집착한다. 화려한 컬러, 투박한 밑창, 가죽·코튼·고무 등 다양한 소재의 스니커즈가 그들의 최애 품목이다. 그 값은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 아니, 어떨 때는 수천만원에 이른다. 백화점의 샤넬·루이비통·에르메스 등 명품 매장은 들어가는 데만 60~70명의 순번을 기다려야 한다.

    수백만원대의 가격은 우습게 들리고 천만원대가 손쉽게 넘어가는 명품 매장인데, 그 고객들이 모두 고작 스무 살이 넘었거나 기껏해야 30대인 MZ세대다.

    현대의 부자들은 여가가 없는 '무한(無閑)'계급

    절약이 미덕이었던 앞세대와 확연히 대비되는 MZ세대의 낭비와 사치는, 현대판 귀족인 부자들을 모방함으로써 그들과 동등해지려는 신분 상승 욕구의 표출이다.

    상류층이란 모름지기 여타 계급과 차별화됨으로써만 상류층인 법. 인류 역사상 '사치'와 '여가'야말로 그들을 여타 계급과 차별화해 주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명품을 소지하고 부자들의 낭비와 사치를 흉내낸다면, 부자들은 이제 어떻게 스스로를 이들과 차별화할까? 저자는 역설적으로 그 열쇠를 '검약과 바쁨'에서 발견한다.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을 쓴 게 무려 두 세기 전인 1899년. 그러나 현대의 부자들은 스티브 잡스의 청바지나 마크 저커버그의 후드 저지처럼 검소한 복장에, 빌 게이츠처럼 한국에서 샌드위치 점심에 반나절 동안 대여섯 개의 일정을 소화하고 당일 중국으로 떠나는 무한(無閑)계급이 됐다.

    젊음-예찬과 우려 사이

    젊음의 사치를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따라간 이 책은 그러나 젊음의 역동성과 욕망에 무한정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현상을 현상으로 관찰해 해석하고, 자연히 그리 될 수밖에 없는 MZ세대의 욕구불만과 아픔에 공감하되, 그것이 건강한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젊음의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모방된 욕망이다. 그 누구도 나의 인생을 살아 주지 않고, 나는 나일 뿐인데, 우리는 너무나 타인의 시선에 나의 존재를 위탁하고 있었다.

    젊음은 한 시절이고, 따라 하면 따라 할수록 상류층은 '사치와 여가의 저편'으로 훌쩍 달아나 있다. 인류를 고귀하게, 개인을 기품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진짜 사치품'은 결국 인문적 사유와 예술을 음미할 줄 아는 안목이다.

    ■ 저자 소개

    현대인들은 똑같은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라도 시장 물건이 아니라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을 엄청나게 비싼 값에 산다. 실제로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방증이다. 저자 박정자는 그 욕망의 근원에 상향 계층이동의 욕구가 있음을 전작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에서 갈파했다.

    그리고 지금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 다시 보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럭셔리를 추구하는 현대사회를 새롭게 분석한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극도로 고도화된 정보기술, 전 지구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 전통적 금융과 예술계를 위협하는 가상화폐와 NFT 미술 열풍 등이 상응하는 이론의 틀 속에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박정자의 다른 책들로는 '빈센트의 구두', '시선은 권력이다', '이것은 APPLE이 아니다', '마이클 잭슨에서 데리다까지',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 조각', '시뮬라크르의 시대', '잉여의 미학', '눈과 손, 그리고 햅틱',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변증법적 이성비판(공역),과, 푸코의 '성은 억압되었는가?', '비정상인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만화로 읽는 푸코', '푸코의 전기', '광기의 역사 30년 후',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 앙드레 글뤽스만의 '사상의 거장들' 등이 있다.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를 했다. 박사논문은 '비실재 미학으로의 회귀: 사르트르 집안의 백치를 중심으로'다. 상명대학교에서 사범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많은 팔로워가 좋아하는 페이스북 필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