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조항 신설했는데 '취업규칙 변경' 아니라는 양승동 KBS 사장… 벌금형 위기
  • ▲ 양승동 KBS 사장이 9일 오후 서울 남부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양 사장은 2018년 KBS 정상화를 위해 만든 진실과미래위원회(진미위)의 운영규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동의를 충분히 구하지 않은 혐의(근로기준법 위반)를 받고 있다. ⓒ정상윤 기자
    ▲ 양승동 KBS 사장이 9일 오후 서울 남부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양 사장은 2018년 KBS 정상화를 위해 만든 진실과미래위원회(진미위)의 운영규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동의를 충분히 구하지 않은 혐의(근로기준법 위반)를 받고 있다. ⓒ정상윤 기자
    2018년 '진실과미래위원회(이하 진미위)'를 신설할 당시 근로자 과반 이상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혐의(근로기준법 위반)로 기소된 양승동 KBS 사장이 지난 9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적절한 시점에 징계대상자에 대한 사면조치를 검토하겠다"며 진미위 출범 후 정직이나 감봉 등을 당한 KBS 직원들을 구제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쳤다.

    이는 최근 진미위의 위법성과 부당성을 지적한 중앙노동위원회 판정 등으로 부쩍 '위기의식'을 느낀 양 사장이 최종 선고를 앞두고 칼자루를 쥔 재판부에 사실상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호소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분석이다.

    재판 당일 양 사장을 업무상 횡령 혐의로 경찰에 고발한 허성권 KBS노동조합위원장은 "그동안 사내 노동조합들이 30여건이 넘는 성명서를 통해 진미위를 규탄하고 비판했음에도 눈과 귀를 닫고 있던 양승동 사장이 형사재판까지 몰리자, 이제 와서 사면조치를 운운하고 있다"며 "전형적인 책임회피성 발언으로, 진정성이 1도 느껴지지 않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허 위원장은 또 "이날 사측 증인 중 한 명이 '기존 감사실은 중대한 비위나 규율 위반 등을 감사대상으로 하지만 진미위는 편성규약 위반 등 조사대상 범위가 더 넓다'고 말하자, 재판부가 '진미위 설치로 징계대상이 넓어지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며 "이는 재판부가 징계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지는 것만으로도 취업규칙의 불이익한 변경에 해당할 수 있다는 시각을 내비친 것"이라고 해석했다.

    양승동 사장 "'감사실이 제 기능 못 했다'는 여론 높아"


    9일 오후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변호인단을 이끌고 출석한 양 사장은 '근로자 과반의 동의 없이 취업규칙을 변경한 것은 위법'이라는 검찰의 지적에 "당시 진미위 운영규정이 취업규칙 변경이라는 지적을 받았다면 당연히 구성원들의 의견청취 절차를 밟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 사장은 "진미위 운영규정을 만들면서 여러 법률자문을 받았지만 '자체 감사기구의 권한과 중복되고, 공공감사에 관한 법률와 방송법에 위배된다'는 의견만 있었을 뿐 '취업규칙의 불리한 변경'이라는 지적은 받지 못했다"며 법규 위반에 대한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징계시효(2년)이 지난 사안은 조사만 했을 뿐 징계대상도 아니었고, 일부 구성원들의 징계수준과 징계대상도 최소화했다"며 "진미위를 신설하고 운영한 취지는 애당초 징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여러 불공정 사례들을 적발하고 재발 방지 차원에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양 사장은 "제가 사장으로 치임한 2018년 상반기, KBS 사내에 방송의 독립성·공정성 침해 사례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가 상당했다"며 "따라서 과거 잘못에 대해 통렬히 성찰하고 이런 불행한 일이 재발돼선 안 된다는 게 임직원들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KBS 감사실도 책임이 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며 "새 경영진은 이러한 사내 요구를 받아들여, 징계시효가 지난 사례까지 조사하는 진미위 운영규정을 만들게 됐다"고 해명했다.

    양 사장은 최후진술 이후 '진미위 운영 이후 KBS의 신뢰도가 좋아졌느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여론조사에서 신뢰도가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권오훈 PD "진미위 설치 때 취업규칙상 '불이익 변경' 지적 없어"


    이날 피고인 측 증인으로 출석한 권오훈 PD는 "KBS 감사실과 외부 법률자문을 받을 때 근로자 과반의 동의가 필요한 규정이라는 지적이 전혀 없었다"며 고의가 없었다는 양 사장의 주장을 거들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3대 위원장 출신으로 진미위 출범 당시 전략기획실 혁신추진부장을 맡았던 권 PD는 "진미위 운영규정 초안은 KBS 정상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라 신중한 검토를 거쳐 만들었다"며 "당시 운영규정이 근로자에게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이라는 지적이 나왔다면 근로자 과반 동의를 거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감사실은 물론, 진미위 설치에 반대했던 노동조합이나 일부 이사들도 자체 감사기구와의 충돌 가능성만 언급했을 뿐 근로자에 불이익한 취업규칙 변경이라는 지적은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권 PD는 "진미위는 기간방송사의 공적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특위로 설치된 것으로, 운영규정은 MBC에서 먼저 만든 '정상화위원회'를 참고했다"며 "당시 외부 법률자문을 맡은 법무법인 정세 등이 '자체 감사기구의 권한과 중복되고, 공공감사에 관한 법률과 방송법에 위배된다'는 의견을 개진함에 따라, 운영규정 10조에 있는 '징계를 요구할 수 있다'를 '징계를 권고할 수 있다'로 수정했다"고 밝혔다.

    "근로기준법 위반 여부 몰랐다" VS "고의성 있다"


    이날 공판에서는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한 고의가 없었다"는 양 사장 측과 "고의성 입증에 무리가 없다"는 검찰 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

    양 사장 측은 "사내 안팎의 법률자문을 거쳤음에도 근로기준법 위반 여부에 대한 지적이 나오지 않아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검찰은 "징계시효를 넘어선 사안까지 직원들을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징계권고로까지 이어지는 운영규정을 만들었다는 것은 굳이 법률적 판단을 거치지 않아도 '취업규칙의 불리한 변경'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경영진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고 반박했다.

    특히 "△사내 감사기구가 있음에도 중복되는 진미위를 신설했고 △진미위 운영규정에 따라 징계시효가 지난 사안을 조사해 직원들에게 새로운 위험이 생겼으며 △진미위 조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징계를 받을 수 있는 점 등은 진미위 운영규정이 취업규칙의 '불이익한 변경'임을 가리킨다"고 양 사장을 압박했다.

    이 같은 지적에 양 사장과 증인들은 "△진미위 신설 당시 감사실이 제구실을 못했고 △방송 공정성 회복을 위해 감사실의 조사범위를 넘어선 편성규약 위반 여부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으며 △진미위는 징계를 권고하는 수준에서 그쳤고 실제 징계는 인사위원회 심의를 거쳐 이뤄졌다"고 해명했다.

    앞서 양 사장을 약식기소한 검찰은 재판부 직권으로 이뤄진 공판에서 따로 구형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양 사장의 구형량은 약식기소와 동일한 벌금 150만원으로 갈음됐다.

    양 사장의 선고공판은 오는 4월 15일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