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악이 아니라 '질병'으로 간주… 가해자가 책임지고 피해 회복, 사회 재건하는 움직임
  • ▲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가 지난 1월 22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등 혐의로 기소된 이중근 회장에게 징역 2년6월을 선고한 뒤, 기업의 준법감시가 양형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정상윤 기자
    ▲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가 지난 1월 22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등 혐의로 기소된 이중근 회장에게 징역 2년6월을 선고한 뒤, 기업의 준법감시가 양형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정상윤 기자
    "준법감시를 위해 힘쓰고 있다. 유리한 정상(情狀·책임 경중에 영향을 미치는 사정)이다"

    4000억원대 횡령·배임 등 혐의를 받은 이중근 부영 회장 재판에서 나온 재판부 발언이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는 지난 1월 22일 오후 2시 5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등 혐의로 기소된 이중근 회장 등의 선고기일을 진행했다. 이날 이중근 회장에게는 징역 2년6월의 실형이 선고됐다. 2018년 11월 13일 1심 재판부의 선고 형량(징역 5년)보다 절반이나 준 것이다.

    재판부는 "(부영은) 2019년 준법감시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외부인에 의한 독자적인 준법감시를 수행하기 위해, 준법감시인 위임계약을 체결하는 등 준법감시를 위해 힘쓰고 있다"며 양형이유를 설명했다. 다만 이같은 '유리한 정상'을 감안하더라도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한 피해규모, 구속되고 처벌받은 전력 등을 보면 이중근 회장의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준법감시가 양형에 유리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부영 계기로 '준법감시가 양형에 유리할 수 있다' 기대

    이 판결 이후 준법감시에 대한 법조계 관심이 높아졌다. 준법감시가 '감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정준영 부장판사는 뇌물공여 등 혐의를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첫 재판에서 "(준법감시위원회 설치가) 재판 결과와 무관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1월 17일 그 말을 뒤집는 발언을 해 주목을 끌었다. "삼성의 준법감시제도는 실질적이고 실효적으로 운영돼야 양형 조건으로 고려될 수 있다"며 "양형 심리와 관련해 (삼성이) 제시한 준법감시제도의 점검이 필요하다"고 밝히면서다.

    이후 지난 3일 삼성그룹 7개 계열사들의 준법감시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준법감시는 금융회사 임직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 법규를 준수하도록 준법감시체계를 마련하고 이를 운영·점검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김지형 전 대법관이 위원장으로 있다. 봉욱 전 대검 차장검사도 외부위원으로 활동한다. 현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국정농단' 관련 재판을 받고 있다.

    '치유법원프로그램'에 관심 집중

    이중근 회장의 감경,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재판부 발언 등을 두고 일각에서는 '기업인 봐주기 아니냐'는 쓴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이중근 회장의 항소심 재판부가 '준법감시'를 언급한 이유는 준법감시가 '치료 사법' 내지 '회복적 사법'(이하 회복적 사법)과도 연결돼서다. 준법감시 제도가 회복적 사법 범주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가 회복적 사법을 주장해 온 인물이라는 점이 주효했다.

    실제 정 부장판사는 2019년 8월 23일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도주치상) 등 혐의로 기소된 A(35)씨의 항소심 재판에서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그는 치유법원 프로그램 내용을 두고 "직권으로 보석 석방하고 3개월 동안 절대 술을 마시지 않은 뒤, 이를 양형에 반영하고 최종 판결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A씨는 정 부장판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3개월 뒤인 2019년 12월 4일, 정 부장판사는 1심에서 선고한 징역 1년의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A씨가 프로그램을 성실히 이행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정 부장판사가 강조하는 회복적 사법은 무엇일까. 회복적 사법은 범죄를 보는 시각이 '악'에서 '질병'으로 바뀐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악이 아닌 질병은 형벌이 아닌 치료로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때의 대전제는 가해자의 반성이다. 1970년대 무렵부터 회복적 사법을 중시하는 경향이 각 나라에서 나왔다. 재범 방지·피해 회복을 위한 공동체 프로그램 등에 초점을 두는 담론 내지 경향인 셈이다. 소년범죄에 대한 처분 등을 규정한 '소년법'도 회복적 사법의 일환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회복적 사법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회복적 사법의 활용을 위한 기본원칙은 2002년 7월 유엔의 경제사회이사회에서 승인됐다.

    학계, '회복적 사법의 가치' 평가

    일부 학계 인사들은 일찍부터 회복적 사법의 가치에 주목했다. 2005년 김상돈 성균관대학교 교수의 '형사사법과 회복적 사법' 논문 등에 따르면, 회복적 사법은 가해자에게 '범죄 에 따른 피해, 사회적 영향 등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가해자가 범죄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는데 책임을 지고 △이를 토대로 사회가 재건되며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커뮤니티도 재건한다는 내용 등이다. 피해자-가해자의 조정·합의를 필요로도 한다. 이는 손해, 가해자 책임의 경중 등에 따라 형량을 정하는 형사 사법시스템과 다르다. 회복적 사법이 윈-윈(win/win)전략을 추구한다는 학계 평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종환 제주산업정보대학 교수 역시 2008년 '회복적 사법의 교정 복지 적용에 관한 연구'를 통해 "(회복적 사법은) 재범률을 감소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평했다. '처벌위주의 형사사법체계'가 가해자의 반성 등에 중점을 두지 않아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고도 지적했다.

    최근 법원 내의 회복적 사법 움직임을 두고, 그 필요성에 공감하는 법조·학계 의견이 있다. 다만 특정 사건에서의 회복적 사법에 방점을 두기보다, 소년재판 등에서부터 확대돼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박종흔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는 "피해자-가해자 모델에 있어서 결국 '화해'와 '조정' 측면으로 나아가고 사회적인 재건·회복 쪽으로 가는 '회복적 사법 제도'는 분명 필요한 제도이고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면서도 "특정 사건 피고인들에게 회복적 사법이라는 이름으로 형량이 낮아지면 국민 법감정상 받아들이기 어려울 우려도 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또 "현재 기업 경영 과정에서 투명성이 요구되고 있고 윤리경영을 위해 상장회사에서도 준법감시인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며 "이같은 준법감시인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의) 불법적인 행위가 줄어들 가능성은 있다"고 평했다. 이어 "회복적 사법은 소년재판 등에서부터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부연했다.

    "소년 재판부터 회복적 사법 확대해야"

    서울 소재의 모 법학전문대학원 B 교수는 "회복적 사법은 응징적·응보적 사법에서 가해자의 물질적 보상, 사회 봉사 등과 같은 치료 사법으로 바꾸겠다는 방향 내지 이념으로 청소년 범죄에서 적용되기 시작했다"며 "'범죄피해자 보호법'에 있는 '형사조정제도'도 넓은 범주에서 보면 회복적 사법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의견이다.

    회복적 사법을 판결에 실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한 법조계 의견도 조금씩 나온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법조인은 회복적 사법의 제도화가 미비하다고 지적한다. 회복적 사법이 법원 내부로 들어온 것이 최근이라는 사실도 문제로 지목했다. 다만 그는 "가해자가 먼저 반성하고 이를 표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면 이를 법관이 양형 사유에 참고할 수는 있다"고 평했다.

    형법 51조는 △피고인의 연령, 성행, 지능, 환경 △피해자에 대한 관계 △범행 동기, 수단, 결과 △범행 후 정황 등 사항을 참작해 형을 정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동법 53조는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작량해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