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축음기’ 소리에 북녘 ‘보릿고개’를 점치다“안에서 들고 일어나고, 밖에서 두드리는 수 밖에...”
  • 李 竹 / 時事論評家

      낡은 축음기(蓄音機) 소리가 또 들린다. 올해도 봄은 어김없이 우리네 곁에 와있다. 하지만 이 나라 안팎과 주변을 돌아보면, 그 언제 적, 그 누군가가 ‘春來不似春’을 ‘춘래불이춘’으로 여러 차례 읊었다는 일화(逸話)만이 씁쓸하게  떠오를 뿐이다. 그리고...

      “전체 인민이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하려는 것은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의 평생 염원이며 조선 혁명가들의 이상이고 투쟁 목표...”

      ‘하노이 쑈’가 끝나고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엊그제, 북녘의 세습독재자가 그 무슨 ‘전국 당 초급선전일꾼대회’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동네 어르신들이 가끔 앞산 해넘이를 보면서 “내일은 비가 오겠구나”하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신통하게 아침에 일어나면 날이 궂었었다.
      이런 정도의 통찰력(?)에는 못 미치지만, 반백년(半百年)을 넘게 틀어온 그 축음기 소리로 올해도 북녘의 ‘보릿고개’가 매우 높고 가파르겠다는 건 대충 짐작할 수 있겠다.

      흔히, ‘속내’ 또는 ‘복심’(腹心)이란 말을 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음흉한 속마음을 이르는 걸 게다.

      “전체 인민이 흰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이라...
      북녘 ‘백도혈통’(百盜血統)의 대(代) 내림 ‘공갈빵’ 아닌가. 그 ‘속내’나 ‘복심’은 이런 것이 맞지 싶다.

      “할애비·애비가 그랬지만, 나도 그럴 맘은 전혀 없거든... 그저 귀들이 호강하라고 하는 말이지!”

      그렇다! 북녘의 인민들에게 그 ‘공갈빵’만으로 만족하라는 개무시와 협박에 다름 아니다. 이는 ‘인민들의 태평성대’가 곧 ‘백도혈통’(百盜血統)의 몰락으로 연결된다는 사실[史實+事實]을 할애비·애비 때부터 너무 잘 알아왔기 때문이다. 그 ‘편지’ 내용의 일부라는 아래 대목은 그걸 웅변(雄辯)한다.

      “자력갱생, 자급자족의 기풍은 우리가 가장 빨리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 우리나라의 항구적인 경제 발전 전략...”
      한마디로 “쭉 굶주리자!” 아닌가. 누가 써다 바치는지, 작문 솜씨 하나는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과연 그 공개적인 ‘편지’란 것이 북녘 ‘인민’들만 보고 들으라고 한 것일까? 단언컨대 “아니다”라고 감히 주장한다.

      ① “남북경협의 활성화는 북녘 ‘인민’들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며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는 배울 만큼 배워 처먹은 남녘의 ‘얼간이’들에게 동의를 요구하는 짓거리이다.

      ② ‘조공(朝貢)주도 성장’을 늘 입에 달고 다니는 통 크신 ‘거간꾼’과 그 언저리들에게 보란 듯이 내미는 백지 청구서 아니겠는가.

      ③ 북녘의 물난리·가뭄·흉작·돌림병 등이 생겼다 하면, 득달같이 나타나서 존재감을 과시하곤 했던 국제사회의 얼치기 ‘인도[引盜:도둑을 끌어들임]주의자’들에게는 ‘낭보’[朗報 반가운 소식]가 될 것이다.

      이유와 노리는 바는 단지, “돼지저금통’이 바닥나고 있으니 얼른 채워줘!”일 테고... 덧붙인다면, “인민? 그 까있 것, 언제는 안 그랬나 뭐,,,”

      솔직히 짚어보자. 북녘의 세습독재자가 인민들의 ‘보릿고개’를 조금이나마 평평하게 만들 수 있는 농사(農事) 능력은 없다 해도, 그 방법이야 ‘핵포기’라는 건 뻔히 알고 있지 않을까. 이쯤에서...

      현재 북녘 ‘인민’들의 계속되는 찌든 살림살이에 대해 그 원인이나 배경을 이른바 ‘강력한 대북(對北) 경제제재’에서 찾으려 하는 얼간이·얼치기들에게 다시 들려주고 싶은 현자(賢者)들의 말씀이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언급한 것도 한 두 번은 아닐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에서 죽은 사람보다 방향이 잘못된 경제체제 때문에 굶어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어느 나라 국민이 흉년을 만나 굶어 죽느냐 살아남느냐는 당시의 통치자가 국민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감정적 일체감을 갖고 있느냐에 달렸다.”

      “최근에 대량 아사(餓死) 사태가 일어난 나라는 수단과 북한 두 나라뿐이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체제의 비민주성 때문이다. 북한에선 총을 가진 계급은 식량을 얻고 총에서 멀리 떨어진 계급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이런 글도 있단다. 할애비·애비 시절과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도 있다.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우게 된다... 수령에게 인간적·동지적으로 매혹될 때 절대적인 충실성이 우러나오는 것...”

      그간의 ‘어법’(語法), 이른바 ‘빨갱이’들의 말장난은 다 그래왔었다고들 한다.

      “앞으로 인민들 사이에 인간적·동지적 매혹이 생겨나게끔 정보를 더욱 철저히 통제하면서, 교묘하게 조작(造作)·선동(煽動)해 나갈 거야!”를 에둘러 던진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이면(裏面)에는...

      몇 년 전 내놨던 “세 살 때부터 총을 쐈고, 목표물들을 모두 맞혔다”든가, 제 할애비·애비가 써먹던 ‘솔방울 수류탄’이나 ‘축지법’ 등 황당한 우상화(偶像化) 놀음이 인민들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그 보다는 특히, “인간적·동지적 매혹”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아마도...
     
      압제(壓制)·공포(恐怖)와 가난[굶주림]이 구조화된 집단이나 국가에서 ‘인민’들의 저항과 봉기, 그 가능성과 크기는 ‘배 고픔’보다는 ‘배 아픔’에 좌우된다는 사실[史實+事實]에 대해 이미 계산을 마쳤다고 하면 너무 나간 것일까? 어찌 됐던 간에...

      지난 ‘하노이 쑈’ 이후에 북녘 ‘비핵화’와 관련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단다. 이제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한 ‘비핵화’라는 단어는 걷어치워야 할 때가 된 듯하다.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북녘의 핵포기’라고 해야 하고, ‘대화와 협상’이 결코 바른·빠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증명되지 않았나 싶다. 결국에는...

      “세습독재는 결코 독재자 스스로 막(幕)을 내리지 않는다. 안에서 들고 일어나고 밖에서 두드리는 두 힘이 호응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정답은 여기에 있는데... 여기까지만 하자. 긴 한숨과 함께...
    <이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