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발굴도... "제2의 조앤 롤링, 한국서 나올 수 있습니다"
  • ▲ 이구용(53) KL매니지먼트 대표. ⓒ 뉴데일리
    ▲ 이구용(53) KL매니지먼트 대표. ⓒ 뉴데일리
    우리나라 작가가 쓴 소설이 '미드(미국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즐거워지는 일이 조만간 현실화 될 조짐이다.

    2008년 출간된 작가 신경숙의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의 미국 드라마 판권이 팔렸다. 이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은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 시리즈로 유명한 영화 감독 '줄리 앤 로빈슨(Julie Anne Robinson)'이다.

    그는 "'엄마를 부탁해'는 어머니를 여의고 죄책감으로 곤경에 처한 가족의 경험을 아름답고 진솔하게 그린 소설"이라며 "이 가족의 여정을 하루빨리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판권을 사들인 '블루 자 픽처스(Blue Jar Pictures)'는 줄리 앤 로빈슨 등 베테랑 연출가들이 합심해 설립한 영미권 콘텐츠 전문 제작사로, 조만간 드라마를 방영할 방송사와 제작 일정 들을 확정·발표할 예정이다.

    20여년간 1000개 문학 작품, 수출 성공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이번 계약을 성공시킨 장본인은 이구용(53) KL매니지먼트 대표다. 23년째 우리나라 문학 작품의 해외 판권 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1,000개 이상의 국내 작품을 해외 출판 시장에 론칭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 소개된 한국 문학 작품 대부분은 이 대표의 손을 거쳤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이 대표는 "다른 국내 출판 에이전트들이 주로 해외 저작물을 수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면 저는 우리 작품을 영미 유럽 시장에 수출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다"며 "영미 유럽에는 주로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아시아권에는 전 장르를 망라해 판권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작품을 해외 시장에 소개해 번역·출판되도록 다리를 놓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영역을 넓혀서 출판 뿐 아니라 영화·오페라·뮤지컬 분야로도 판권 계약을 추진하고 있죠. 출판 문화가 발달한 영미 유럽의 경우 나름 경쟁력을 갖춘 문학 작품 위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요. 동남아·동북아 시장은 피드백이 빨라 장르를 가리지 않고 판권 수출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 대표는 "문학 작품 수출은 호흡이 길고 언제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 에이전트가 사업 모델로 삼기엔 여전히 위험 요소가 많은 분야"라고 밝혔다. 해외 네트워크도 중요하지만 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열정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 그는 "시간을 투자해 책을 읽지 않으면 작가의 마음이나 마케팅 포인트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시작부터 상당한 인내와 끈기가 요구되는 사업"이라고 밝혔다.

    "그때그때 수익이 잘 난다면 다들 '수입'보다 '수출'을 하려고 하겠죠. 문학 작품 수출은 호흡이 꽤 깁니다. 언제 결과가 나온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게다가 일단 책을 읽어야 작품의 개성이나 특징을 캐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당한 시간과 끈기가 필요한 거죠. 작품을 선택하고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만만치가 않습니다. 비즈니스 모델로는 좋지 않죠."
  • ▲ 소설 '엄마를 부탁해' 미국판 표지. ⓒ 뉴데일리
    ▲ 소설 '엄마를 부탁해' 미국판 표지. ⓒ 뉴데일리
    "신경숙 작품 통해 해외시장 성공 확신"

    이토록 진입 장벽이 두터운 시장에 이 대표가 뛰어든 이유는 우리 문학도 세계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음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한국외국어대와 경희대 대학원에서 영미문학을 공부한 그는 박사 과정을 준비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저작권 에이전시(임프리마코리아)'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곳에서 해외 출판물을 수입하는 업무를 진행하던 이 대표는 거꾸로 '우리 문학을 외국에 소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16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독립, 국내 출판물을 해외 시장에 알리는 전문 에이전트로 변신을 꾀했다.

    "95년 아는 선배 권유로 면접을 본 회사에 덜커덕 합격을 한 거예요. 그때부터 16년간 '임프리마코리아'에서 일을 했어요. 하다보니 우리 작품을 외국에 소개하면 먹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09년 5월경 신경숙 작가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고 해외 파트너들에게 작품 소개를 했는데, 나름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실제로 2011년 미국에서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Please Look After Mom)'는 초판이 10만부를 넘어서며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이 대표는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계간 '창작과비평' 연재를 마치고 2008년 11월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라는 짤막한 기사를 보고 '이건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며 "치매 걸린 어머니를 잃어버린 가족이 겪는 에피소드 이면에 담긴, '사람은 어떤 걸 잃어버린 후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보편적인 가치가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살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이 대표가 발굴·소개


    "단순히 어머니를 잃은 가족들의 이야기로 읽힐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거죠. 게다가 이 작품은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나라 농촌과 도시의 풍경을 그려, 한국 문학 특유의 개성도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들이 영미 유럽에서 나름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경숙 작가와 손을 잡으면서 시작된 이 대표의 문학 수출 사업은 2011년 임프리마코리아의 해외 저작권 수출 사업을 넘겨받아 'KL매니지먼트'를 차리면서 본격화됐다. 조경란의 '혀',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정유정의 '7년의 밤' 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 대표의 손을 거쳐 전 세계 40여개 나라에 소개됐다.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의 역작,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도 이 대표의 작품이다.

    "2005년부터 김영하, 조경란, 신경숙, 공지영, 안도현, 편혜영, 이정명, 정유정, 서미애 등 20여명의 작가들 작품을 해외 시장에 알리고 판권 계약을 했습니다. 아마 40여개 나라에 출판됐을 거예요. 내년 초에도 김언수 작가의 소설 등 몇몇 문학 작품을 해외 시장에 선보일 예정입니다. 많은 작가들의 성공 사례가 다른 작가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점점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폭이 넓어지고 우리 문학 작품이 소비되는 지평도 확장되리라 확신합니다."

    "신경숙 해외 진출 불과 10년... 대단한 성과로 볼 수 있어"

    이 대표는 "많은 작품들이 해외 시장을 노크할수록 그만큼 성공 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이는 우리 문학이 또 다른 '문화 컨텐츠'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됨은 물론, 침체된 국내 출판 시장에도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가 출발은 늦었지만 빠른 속도로 세계 시장 중심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미 80년대부터 영미 유럽 시장에 널리 알려졌는데요. 신경숙이 세계 시장에 진출한 건 불과 10년 정도 밖에 안됐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신경숙 작가와 한강 작가가 '맨아시아 문학상'과 '맨부커상'을 수상하고,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이 29개 나라에 수출되는 일련의 경사들은 정말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표는 "과거와 비교해볼 때 해외 시장에서 성공하는 사례가 많아졌고 성장 속도도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며 "조만간 우리나라 작품 중에서도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고 내다봤다.